월간성찰 2020년 6월호
6월의 일상은 뭐가 없이 잔잔하게 흘러갔다. 회사에선 상반기 보고 시즌이라 그만큼 바빴다. 상반기 보고는 2020년의 KPI를 돌아보고 얼마만큼 목표를 달성했고, 뭘 잘했고 뭘 못했는지를 분석하고, 평가받고, 남은 하반기 계획을 세우는 일을 한다. 앞으로 6월을 제일 싫어하게 될 듯.
전반적으로 굵직한 이벤트 없이 잔잔하게 흘러갔다. 기록을 안 해서 그런가, 캘린더를 뒤적거리며 한 달을 회고하는데 딱히 월간성찰에 기록할만한 건덕지가 없다. 이래서 기록은 몰아서 하는 게 아니라 평소에 하는 것인가보다. 없는 농사 긁어서 이번 달의 수확을 적어 보련다.
나에게 일어난 3가지 사건
1) 주식
부끄럽게도 나는 경제 지식이 부족할 뿐 아니라 관심도 없었다. 이상한 프레임일 수 있으나, 어릴 땐 마냥 (여자가) 돈에 관심 두는 게 돈 밝히는 것처럼 보일까 봐 애써 무시했다. '나는 이런 거 관심 없어요. 그래도 행복해요' 이런 천진난만한 바보 같은 이미지를 그땐 왜 그렇게 추구했을까.
십 대시절, 유학 준비하면서 만난 친구가 우리 동네를 쭉 둘러보고선 "여긴 집값 얼마야?"라고 묻는 게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10년 넘게 살면서, 내가 살던 동네 집값도 몰랐고, 관심 가질 생각도 못 했는데 이 친구는 왜 그런 걸 묻지? 라는 물음표만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수(숫자)에 밝지 않고 인간관계에 계산적이지 않으며 남들한테 잘 쓰고 (나한테만 지독하게 아끼는) 그런 생활을 29년간 해왔다. 30을 앞두고, (뒤늦게) 돈의 세계에 눈을 떴다.
즉, 자나 깨나 돈 불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예전엔 돈을 억만장자처럼 많이 벌 생각도 안 했다. 내가 얼마 버는 지도 관심 없었다 (본인 월급도 몰랐음 ;ㅅ;). 돈 버는 데 욕심이 없었고 혈안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었던 적도 있다. 애초에 연봉 보고 직업을 가르지 않은 것.
한국에서의 첫 직장, 내 첫 연봉은 3천도 안됐다 (야근비도 따로 없었다). 엄마한테 그 돈 벌려고 유학 갔다 왔냐는 말도 들었고, 주변에서 학벌이 아깝다는 말도 들었지만, 돈(연봉)에 관심이 덜했기에 딱히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도 '돈 없어도 난 행복해, 내가 아껴 살면 되지 (돈 없으면 죽지 뭐)' 이딴 가볍고 철없는 생각을 하다니...
남자들은 모이면 주식, 부동산, 돈 불릴 얘기만 한다는데 상대적으로 여자들의 관심사는 다르다기에 요즘엔 내가 주도적으로 (불편한) 돈 얘기를 꺼내고 정보를 교환한다. 생각보다 놀란 건, 얘기해보니, 주식하는 여자도 많다는 점이다. 다들 말을 안 하고 있었을 뿐! 돈
유학할 때, 미국 주식을 열심히 사던 친구가 있다. 또다시 부끄럽게도, 주식을 하는 그 친구가 좋게 보이지 않아서 거리를 뒀었다 (이런 바보 같은 과거의 나!)
6월 인생 처음으로 주식을 매입했다. 주식하면서 그 친구는 잘살고 있는지, 그때 진작이라도 좀 관심이라도 가져보고 어깨 너머로 조금씩 배워둘걸-이런 생각에 그 친구가 종종 떠오른다.
3월에 주식계좌를 만들었으니 3개월을 지켜보고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한 셈이다. (그전에는 아빠에게 돈을 일부 보내고 아빠가 대신 굴려(?)줬다. 어느 주식을 샀는지도 이번 달에 물어서 알았다) 아주 소량의 금액으로 1주만 샀다. 배운 대로 주식 일기도 쓰기 시작했다. 처음 느낀 생각, 왜 사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지, 시간이 지나서 후회하는 것 등 위주로 조금씩 썼다. 워낙 쫄보라 손해 볼까 봐 거액을 넣을 짬이 안된다.
일확천금 대신, 3개월 치 필라테스 1:1 레슨비 정도만 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요동치는 주식시장에 손익은 미미하지만, 커피 한 잔 가격으로 주식을 살 수 있다는 걸 알고 나니 커피 마시는 것도 다시 생각하게 되고, 안 보이던 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게 큰 배움이다.
정기적으로 월급의 %를 주식에 넣을지도 정하고 나니 삶이 조금 더 뚜렷해진 느낌이다. 지금 드는 생각은, 네이버에 입사했을 때, 네이버 주식을 사둘껄...때를 보려 다 보니 자꾸 때를 놓치는 느낌이다.
주식을 결심하고 불필요한 지출을 최소화 했는데, 6월에 [생활비 30만 원으로 생활하기 성공]했다. 어제 가계부를 쭉 써보고 10만 원이 남아서 뿌듯했다. 이렇게만 쭉 지켜지면 좋을 텐데, 그럼 난 샴푸랑 화장품 떨어지면 어떡하지?
2) 외숙모
엄마랑 동갑내기인 외숙모가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심하게 넘어져서 응급실에 실려 간 뒤 수술했다. 양쪽 팔 전체를 통깁스했고 병원이랑 가까운 우리 집에서 며칠간 지내게 되었다. 에어비앤비하려고 열심히 치워둔 동생 방에 첫 게스트로 외숙모가 지냈다. 재택근무하느라 얼굴 보는 날이 많았는데, 내가 일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도 보고,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라고 말할 때마다 두 엄마가 생긴 느낌이라 포근했다. 수술 마친 날, 외숙모와 어울리는 파스텔 꽃다발을 선물 드렸다. 엄마 것도 빼먹지 않았다. 집 근처에 늦은 시간까지 문 열려있는 예쁜 꽃가게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3) 주차권 탈락
얼마나 쓸 게 없으면 이게 사건이 되나 싶지만, 꽤 충격적인 사건이다. 우리 회사는 부족한 주차공간 때문에 3개월에 한 번씩 주차권을 추첨한다. 경쟁률이 제법 치열한데, 운 좋게 나는 3번 연속 당첨됐다. 조금 운이 안 좋은 건, 그 3번 동안 한 번도 꽉 채워서 한 적이 없다. 출장 때문에 일주일만 쓴 적도 있고,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하느라 주차권을 쓴 날보다 안 쓴 날이 많았다. 가장 더운 시기, 운명의 순간 7월에 주차권이 떨어졌다. 이제 다시 뚜벅이 인생이다. 주변 카풀이라도 알아봐야 하나...
3가지 배움
1) 신입의 실수
새로 들어온 신입이 실수를 했다. 전혀 어려운 업무가 아닌데, 별거 아니라고 판단하고 급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회의 시간에 처리하다가 외부업체에 서류를 반대로 전달했다. 신입의 꼼꼼함이 화두가 됐다. 꼼꼼함이 문제가 아니라 본인 업무의 무게를 모르는 것이라 결론지었다. 같은 일을 해도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면 하찮은 일이 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면 귀한 경험이 되는 건데 아쉽다.
2) 엑셀 표
여러 가지 이벤트를 분석하면서 이번 달엔 정말 많은 데이터를 보고 다양한 엑셀 차트를 그렸다. 엑셀 스킬이 +10 올라간 느낌. 슬라이서도 배우고, 피벗 테이블 디자인에서 여러 레이아웃을 써봤다. 인사이트를 잘 뽑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보는 이에게 잘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 같은 내용이라도 더 시각화할 수 있는 차트를 찾고, 한눈에 보이고 깔끔하게 표와 문장을 다듬는 과정도 데이터 클린징만큼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
3) 계약서
웹툰 성격상, 여러 작가님과 계약서를 주고받는 일이 많은데 기다려도 회신이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마감에 쫓기는 걸 알기에 최대한 한 번의 커뮤니케이션에 요점 위주로 설명해 드리고 내가 필요한 것 (=회신)을 제시간에 얻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신입을 만나기 전까지 이게 내 기술인지 몰랐는데, 회신이 없다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신입에게 이것저것 팁을 드렸다.
이메일 제목에 며칠까지 회신해달라는 날짜를 쓰는 것, 서면동의가 뭔지 어려워하는 (어린) 작가님들을 위해 어떻게 하는 건지 예시를 같이 보내는 법, 작가님들이 회신을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배경엔 뭐가 있는지, 그걸 이해하고 나면 무엇을 하면 되는지, 수많은 메일이 쌓여있을 텐데 내가 보낸 메일을 가장 먼저 클릭하고 싶게 만드는 법, 무조건 답을 받아내는 법 등. 나도 누구한테 배운 게 아니라 그저 여러 사람을 대하면서 알아서 터득한 건데. 누군가한테 알려주는 '팁' 이 되니 신기했다. 내 팁대로 하니, 금세 백발백중으로 답이 왔다며 좋아하는 신입을 보며 그때 알았다. 이것도 업무 스킬 중 하나라는 걸.
3가지 만남
1) 이전 회사 파트장님
퇴사하고 3년 만에 처음으로 연락이 닿아서 이전 회사 개발 직군 파트장님을 만났다. 다른 직군의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신난다. 그때 일하던 내 모습이 가물가물한데, 그동안 변하지 않고 예전 모습 그대로라며 좋아하셨다. 한 번의 좋은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빛을 잃지 않는 법이다.
2) 스쿼시 소모임+정기모임 체결
소모임 앱으로 스쿼시 동호회에 참가했으나 회비를 낼만큼 실력이 좋지 않아서 친구들과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스쿼시 치는 모임을 만들었다. 비록 차로 30분, 한시간 코트 예약 25,000원이지만, 2시간 흠뻑 땀 흘리고, 있는 힘껏 공을 쳐 내는 소리에 스트레스가 풀린다. 스쿼시 라켓, 스쿼시 신발도 눈여겨보고 있는데, '취미엔 돈이 많이 들구나'를 느끼는 요즘.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레슨도 받고 싶다.
3) 정기적인 배움
코로나 때문에 사내 스페인어 수업은 일주일 두 번 온라인으로 진행했고 일주일 한 번, 동네 스페인어 수업을 꾸준히 들었다. 매일 조금씩 스페인어 공부하면서, 이걸 이제 배워서 어디에 써먹냐는 현타가 오기도 하지만, 아직까진 즐겁다. 학창 시절에 왜 제2외국어 선택지는 일본어, 불어였을까. 흥미를 못 붙이고 허송세월 보낸 그 시절이 아까울 정도로 스페인어를 조금 더 일찍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독자 편집자 모임도 온라인으로 열띤 토론을 이어나가고 있다. 벌써 9번째 글을 검수하면서 글을 쓰는 사람과 글을 읽는 사람의 온도 차이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이미 어느 정도 그려진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생략하기 쉽고, 글을 읽는 사람은 그 공백이 많아지면 흥미가 떨어지고 대입하기에 어려움이 생긴다. 다양한 문체와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하나의 글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경험이 재밌다. 저마다 다른 글투를 가지고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기획하고 개연성을 부여하면서 캐릭터의 매력을 돋보이는 부분에 내가 강하다는 걸 새로 발견했다. 나는 역시 창작하는 일을 해야 하나보다. 글을 읽고 쓰고 글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 동안 난 지치지 않는다.
나를 변화시킬 1가지 멈춤
짜증
엄마는 내가 독침 같다고 한다. 곧 터질 것 같은 부풀어 오른 풍선마냥 예민해진 상태가 지속하다 보니 짜증이 툭 튀어나왔다. 그땐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다. 습관성 짜증이다. 잘 웃는 사람은 웃는 게 습관인 것처럼 잘 짜증 내는 사람도 짜증 내는 게 습관이 된 거다. 이 쉬운 이치를 깨닫게 된 건 우습게도 아빠를 통해서다.
아빠는 지방 근무로 한 달에 두 번 집에 오시는데, 밖에서는 점잖은데 꼭 집에만 오면 툭툭 짜증을 낸다. 몸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엄마한테 이것저것 시키고, (안방에서 넷플릭스 켜달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집 구석구석을 보면서 여긴 왜 안 치웠고, 이건 왜 옮겼냐 지적하고,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며 외식 제안하는 대신 매번 라면을 끓이라고 한다. 평소 집에서 라면 안 먹는데, 아빠가 오는 날엔 나까지 꼭 라면을 먹게 된다. 엄마는 아빠가 오랜만에 집에 와서 그렇다며 이해하라고 하는데, 마치 어린아이가 투정 부리듯이 짜증 내는 걸 가만히 지켜보면서 도대체 아빠는 왜 집에만 오면 그렇게 투덜쟁이가 되는 걸까 고민하다가 '어라? 나도 그렇잖아?'라는 생각까지 미쳐버렸다.
결국 내가 제일 싫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따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소름 돋았다. 아빠를 떠올리며 습관성 짜증을 서서히 고쳤고, 의식하자 내가 얼마나 쉽게 짜증을 냈는지 더욱 극명하게 보였다. 이번 달은 엄마가 내 습관점수를 8.5점으로 줬는데, 다음 달엔 꼭 10점 만점 받아야지. 안녕 습관성 짜증. 너 정말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