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성찰 2020년 7월호
월말이 되면 마음이 무겁다.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려 해도 피해갈 수 없는 월간성찰 때문이다. 바쁜 현대인에게 한 달을 돌아보는 시간은 소중하고, 하고 나면 뿌듯하지만 시작하기까지 발걸음이 무거운 건 사실이다. 벌써 7번째 하는 건 데도 말이다. 다행히 이번 달부터는 친구도 동참한다. 친구의 월간미가를 읽고 나니 꽉 쪼여진 마음이 슬리퍼처럼 헐거워진다.
지나치게 진지하지 않게 힘을 빼고 가볍게,
친구의 글을 읽으며 늘 다짐한다. 묵혀둔 감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덕지덕지 살이 붙어 묵직해지는 내 글과 달리 친구의 글은 늘 현재, 오늘의 감정에 충실한 느낌이다. 그 가벼움을 닮고 싶다.
매월 말, 월간성찰과 마찬가지로 빼 먹지 않는 루틴이 있다. 가계부 체크. 이번부터 엑셀로 쓰던 가계부를 어플로 옮겼다. 어디서 무엇을 얼마나 썼는지 자동으로 기록돼서 일일이 내용을 입력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대신, 엑셀에서 하듯이 내가 쓴 소비에 대해 0 (보통), -1 (못난 소비) +1 (잘한 소비)로 점수를 매길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지난달보다 지출은 있었지만 이번에도 30만 원 생활비 커트라인을 지켰다. 주식 앱이나 가계부 앱을 수시로 들어가면서 아끼고 모으는 재미를 알아가고 있다.
우리 학교가 나온다고 해서 지인의 추천으로 키싱부스 영화를 봤다. 하이틴영화를 원래 안 좋아했지만, 주말동안 하품하면서 1편, 2편을 연달아 끝까지 봤다. 이걸 보면서 내 청춘은 끝난 느낌이 든다. SF 물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니, 내 연애 세포는 다 죽었나 보다. 너무나 먼 나라 이야기 같은 하이틴 물.
비록 영화 속 이야기지만, 그 감정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부럽고 그 나이 때 할 수 있는 풋풋함과 애절함이 표정에서 묻어났다. 상큼하고 예쁜 외모가 기억에 남아 배우에 대해 더 찾아봤다. 촬영하다가 실제 연인으로 발전했다가 헤어졌다는 소식에 괜히 내 마음이 쓰리다. 헤어진 걸 알고보니 2편 몰입이 굉장히 안되더라.


나에게 일어난 3가지 사건
1) 이사
9년간 살던 옆집이 이사를 한다. 딱히 왕래가 잦았던 건 아니다. 그냥 옆집 딸이 결혼하더라, 나랑 동갑인 옆집 아들이 뭘 하더라 이런 소식만 간간이 접할 뿐. 가정주부인 엄마는 편안한 옷차림으로 있다가 옆집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후다닥 현관문을 닫는다. 의사인 옆집 엄마는 매일 아침 근사하게 차려입고 상주하고 계시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나가신다. 살림살이가 다 보일까 봐 현관문도 조심스럽게 열었던 우리 엄마는 그 모습을 동경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나면 어색한 인사말만 건네며 손에 든 음식 쓰레기물을 한 쪽으로 치운다.
현관문처럼 마음도 닫혀있었는데, 이사하는 날이 돼서야 활짝 열렸다. 옆집 이사 소식은 일하시는 아주머니를 통해 들었다. 이사하는 당일 짐을 옮기기 위해 하루종일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이삿짐 직원들이 왔다 갔다 하며 왁자지껄했다. 엄마는 이사 가기 전에 우리 집에서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다. 이사하느라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하고, 어디 멀리도 못 가는데 바로 옆집에서 따뜻한 집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처음으로 같은 식탁에서 서로 마주 보며 식사를 했다. 의사 엄마와 나와 동갑인 그 집 아들, 그리고 도와주시는 아주머니, 가정주부인 우리 엄마와 재택근무 중인 나. 엄마는 짧은 시간에 이것저것 수려한 솜씨를 보였고 차린 건 없었지만 식사는 대성공이었다. 그렇게 처음 엘리베이터 안이 아닌 곳에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긴 이야기를 나눴는데, 결국 끝에 가서는 두 엄마는 울고 말았다. 더 일찍 마음을 열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사실은 서로가 서로를 동경했다는 사실. '엄마 밥을 먹기 위해서 눈을 뜬다'는 내 말에 의사 엄마는 아들 밥을 차려준 적 없다며... 짧은 시간에 한 끼 밥을 차리는 우리 엄마가 대단하다며 반찬을 먹을 때마다 칭찬하셨다.
조금만 더 일찍 마음을 열었으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서로 들려줄 수 있었을 텐데, 늘 기회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고 깨달음은 언제나 한 발 늦다. 이사간 후 알게 된 사실인데 사실 옆집 남자애랑 난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 무슨 영화 같은 일일까. 서로 몇반인지 몰라서 한참 얼굴보며 졸업앨범에서 서로를 찾을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2) 마찰
길게 쓰고 싶지 않지만 안 쓸 수는 없는 일이다.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늘 크고 작은 사건이 터지기 마련이지만 역시나 사람 문제가 가장 큰 스트레스다. 친구 말대로 개떡 같은 경험 속에서도 배울 점이 분명 있다고 하니 끊임없이 성장의 거름으로 삼으려 해도 똥은 똥이다. 몇 날 며칠 곱씹어 봤지만 이번 교훈으로는 감정적으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 지어야 할 것 같다. 너무 좋거나 신나서 일하는 것도 경계해야 하고, 반대로 미친 듯이 싫어하는 것도 피해야 할 위험 신호다. 감정을 조금 더 배제하고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사람 대하는 것도 일이니까. 그렇지만 그런 식으면 난 고작 고용관계인 것만 같아서 조금 김빠진다.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의 즐거움을 아는데 그걸 포기할 수 있을까?
3) 현실적인 다이어트
하하하. 바로 위에 우울한 글 써놓고 이런 글쓰기가 머쓱하지만, 계속 다이어트를 실패해서 욕심을 버리고 1달 1kg 감량을 시작했다. '에이 고작 한 달에 1킬로씩 빼서 언제 다 빼'라며 코웃음 치기도 했지만, 와 이것도 진짜 쉬운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게 마음먹으니 조금 더 현실적으로 접근하게 되었고 5개월 동안 5킬로가 차근차근 빠졌다. 아직 빼야할 5킬로가 더 남았지만, 드디어 살쪄서 못 입던 치마가 처음으로 들어갔다. 오히려 현실적인 목표를 세운 뒤에, 식단 압박도 느슨해지고 필요할 때 맞춰서 덜 먹고 더 운동하는 게 조절이 가능했다. 기쁜 마음으로 피부관리 4회도 내게 선물했다.
3가지 배움
1) 연대의 힘
나는 늘 혼자였다. 혼자 늘 바빴다. 혼자 공부하고 혼자 찾으며 배우려 애썼다. 어리석었다. 같이 할 수 있는 건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게 참 많을 텐데. 코로나 기간 동안 정말 많은 사람이 입사했다. 우리는 입사 하면 전 직원에게 본인을 소개하는 입사메일을 쓰는 전통이 있는데 그중 유독 한 사람의 입사 메일이 눈에 띄어서 반가운 마음에 나도 바로 답장했다.
그분은 디자이너이자 엄마였고 책을 쓴 작가였고 그 외에도 업무 외적으로 정말 다양한 프로젝트를 하고 계셨다. 주말 동안 그분의 업적(?)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봤는데 찾아봐도 끝도 없이 나왔다. 지인한테 그림 그리는 법을 알려주는 내용으로 브런치에서 수상하고, 이모티콘 그리는 모임을 개최하고, 인스타그램에 글 쓰는 모임을 만들고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이벤트를 열고, 알고 보니 그 뜻이 맞는 사람들이 내가 자주 회의실에서 마주치는 그 사람들이었다. 회사에서는 그런 열정적인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는데 이런 열정을 가진 사람이구나, 새롭게 보였다.
나는 왜 그토록 뭐든 혼자 하려 하고 내 성장에만 눈이 멀었을까? 충분히 다른 사람들을 통해 배울 수 있고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동안 내가 너무 다른 사람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고 마음의 문을 닫은 것 같아서 이젠 여러 명에서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스쿼시 모임을 깨졌지만.
2) 스페인어 인터넷 강의
스페인어 인강을 시작했다. 물론 회사에서 멕시코 원어민 선생님과 매주 1시간씩 점심시간에 수업하고, 매주 월요일 90분씩 따로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한국인 선생님한테도 배우고 있지만, 더 하고 싶어서 인강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멕시코 원어민 선생님을 만나는 기회는 흔치 않지만, 원어민 발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 말고는 모든 부분에서 불만족스럽다. 강의 준비도 미흡하고 가르치는 것도 매끄럽지 않다. 이유를 물어보면 그냥 그렇다고 대답하고, 재택근무라 지금껏 화상으로 수업했는데, 키보드에 스페인어 알파벳이 없어서 영어 알파벳으로 엉성하게 쳐준다. 분명히 ㅇ과 ㅎ는 다른 건데, 강세 표시도 하나도 안 지켜서 엉터리로 배울까 봐 겁난다.
단어 위주인 원어민 수업과 달리 한국어 선생님은 회화 위주로 굉장히 체계적으로 잘 가르쳐주신다. 숙제도 있고, 수업 자료도 알차다. 다만 더 많이 배우고 싶은 나와 달리 수업 진도가 느린 편이다. 아쉬운 부분을 달래고자 문법 위주 인터넷 강의를 듣고, 스페인어 학습에 도움 되는 어플을 깔았다. 스페인어 공부는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있었지만, 올해가 되어서야 말로 제대로 하는 느낌이다.
3) 아빠의 고향친구
내 또래만큼 깨어있는 아저씨라 늘 함께하는 대화가 즐겁다. 아빠를 오랜 시간 봐온 고향 친구이자 무척 유능한 변호사라 아빠와 내가 마찰이 있을 때 아빠 입장과 내 입장을 변론해주신다. 이번 대화에서 기억하고 싶은 아저씨의 말은 '이해하려 하지 말고 인정할 것' 어차피 이해하려 해도 다른 사람의 생각이라 이해 못 한다. '의도가 좋다고 해서 반드시 결론이 좋으리란 법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를 위해서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될지언정 경계해야 할 부분이 있다. 마지막으로 부모한테 효도할 생각보다는 자식은 자식 인생을 잘 살아주는 것으로도 효도가 되므로 별다른 효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
3가지 만남
1) 준경님
이전 회사의 내 팀장님, 나의 롤모델을 퇴사하고 2년 만에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기억해주고 듣는 일은 매우 신선하다. 여전히 멋지시고 빛나는 모습으로 더 높은 곳을 향해 부지런히 달리고 계신다. 나도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2) 미슐랭
고등학교 친구가 대학원 가더니 고생하면서 내 생각이 좀 났는지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학교 앞 떡볶이만 사 먹다가 이런 좋은 곳을 가는 게 좀 어색하긴 한데 그만큼 성장한 우리 모습이 신기하다. 음식은 먹는 게 아니라 음식을 오감으로 즐기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되었다. 항상 내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해주려는 친구에게 고맙다. 음식 사진도 올릴지 말지 고민하다가 코스 요리 중 뭘 골라야 할지 몰라서 결국 생략했다.
3) 우영님
지난 회사에서 퇴사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다. 아무리 순화한다 한들 최악이란 단어를 떨쳐낼 수 없다. 첫 퇴사라 미숙했던 탓에 많은 사람에게 실망과 상처를 안겨줬고, 결국 같이 일했던 팀원들에게 차가운 응원조차 없이 귀국해야 했었다. 출장으로 뉴욕에 갔을 때 사과하고 싶은 마음에 연락도 했었지만 좀처럼 만남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카톡도 뻔한 인사말 한 두 번 오가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내가 노력해도 풀지 못하는 게 있는거라고 포기할 때쯤, 우연히 내가 속한 곳으로 이직하고 싶다는 얘기가 돌고 돌아 내게 닿았고, 사내 이직 추천을 부탁받았다.
이 무슨 운명인고. 연락이 닿기 까지, 아마 그분은 내게 연락을 하지 않을거야- 라는 말을 듣기도 했었지만, 존버는 늘 승리하는 것인가. 마침내 연락이 닿았고 이직 얘기를 꺼냈다. UX 디자이너로 이직할 생각이었지만 주말 내내 얘기 할수록 우리 팀에 더 어울릴 것 같았고 결국 전략을 바꿔서 우리 팀에 지원하기로 했다. 내 이름을 걸고 우리 팀에 추천하는 만큼 잘 해내고 싶어서 어떤 걸 핵심 역량으로 삼을지 추천 키워드에 대해 생각하다가 번뜩 떠오르면 새벽 4시에도 연락해서 서로 한참을 얘기하곤 했다. 참 신기한 인연이다. 약 3년 동안 뉴욕 주재원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지만 그건 차차 이야기를 풀도록 하고 지금은 열심히 돕고 있다.
나를 변화시킬 1가지 멈춤
이부자리
월간성찰을 쓰면 꼭 부끄러운 소재가 하나씩은 나오나 보다. 정리하는 걸 좋아하지만 특이하게 이불 정리는 잘하지 않는다. 어차피 누울텐데, 그거 하나 안 한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 같지 않았다. 아침 시간은 늘 부족하고 정신없고 그마저 신경 쓸 여력이 없달까. 그런데 내게 영감을 주는 친구의 글을 읽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보자마자 이번 기회에 좋은 습관으로 가져가야겠다 다짐했다. 내겐 그저 보이지 않는 집안일의 리스트 82번쯤으로 여겼던 이불 정리를 친구는 이렇게 표현했다.
'짧지만 매일 아침 반복되는 이부자리 정돈은 하나의 의식이다. 하루가 끝나면 나의 이 따뜻하고 아늑한 침대로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아침 기도'
같은 이불을 보고 이렇게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침대에서 자고 일어난 뒤 정리해야 하는 귀찮은 것에서 전쟁터를 앞두고 무사 귀한을 염원하는 하나의 의식으로. 그렇게 시작한 7월의 습관, 이제 정리되지 않은 이불 정리는 스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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