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릭랜드는 잘 다니던 증권사를 갑자기 그만둔 채 부인과 자식을 버리고 어느 날 홀연히 파리로 떠난다. 화자인 '나'는 스트릭랜드 부인의 부탁을 받고 그에게 찾아가 돌아올 것을 종용한다. 스트릭랜드는 열정적이고 진지하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요.'(p.69)
'내'가 그를 설득하는 논리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당신은 가족들에게 큰 죄를 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당신을 비난하고 멸시할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당신에게 없다면 기껏해야 삼류에 그칠 것이다. 보편적으로 공동체에 속한 개인이 지켜야할 법칙이 있다.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서 생각하도록 우리를 강요한다. 스트릭랜드는 이 모든 논리를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답을 한다. 그것은 '난 그런 것 따위는 아무 상관없단 말이오.'이다. 다시 화자가 주장했던 논리를 읽어보면, 그것들은 모두 '남들이 그래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이 논리는 다름아닌 우리가 '꿈'을 찾으려 할 때 스스로를 설득하며 주저 앉히는 말들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명제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배제하고서는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내리는 대부분의 행동에 '나'는 없다.
주인공 스트릭랜드가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그 '미친짓'을 해냈기 때문이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살아버리는 그런 정신나간 짓 말이다. 그는 상징적 의미의 미친짓 말고도, 실제 행동으로도 패륜적인 족적들을 남기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 점에서 신화의 완성을 발견한다. 그의 아들이 아버지와 관련된 오해를 풀기 위해 지극히 정상(?)적으로 쓴 아버지의 전기는 오히려 그를 찬양하는 이들을 당황케 만들었다. 그가 그린 모든 그림의 색채는 빛과 붓, 물과 물감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 행태와 오만한 광기까지가 섞여서야 비로소 빛을 내기 때문이었다. 그의 그림은 특정한 시기에 그려진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그의 온 인생을 쏟아 부은 진실의 집적체로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달과 6펜스는 너무도 유명해서 이제는 거의 이상과 현실의 대명사 정도가 되어버렸다. 직장 독서토론 모임에서 이 책을 첫 번째 책을 선정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사실 모임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당장 그 자리를 박차고 꿈을 찾아갈 리 없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매번 가지 않은 길을 아쉬워 하며 살도록 되어 있으며, 그 길로 간 누군가도 우리가 가는 이 길을 그리워 하며 살 것 또한 알고 있다. 프루스트의 말처럼 '두 길을 모두 갈 수 없음을 아쉬워 하며, 가지 못한 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스트릭랜드는 사람이 적게 간 그 길을 택한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고, 그 길에서 완성된 결실을 맺은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그가 신화가 되기까지 정상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신화의 완성에서 내면 깊숙이 잠재되었던 터무니 없는 꿈의 실현을 대리만족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종종 독자를 위한 해설이 실리지 않았더라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이 책이 특히 그렇다. 이 소설이 '폴 고갱'을 소재로 쓴 책인 것은 다 알고 있다. 굳이 해설에 사실은 고갱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스트릭랜드와의 차이를 밝혀 놓은 점에서 책 전체의 흥미가 급격히 반감되어 버렸다. 우습게 떠오른 생각은, 스트릭랜드의 아들이 아버지를 위한답시고 아버지의 신화를 무너뜨리더니, 이 책의 역자는 독자를 위한답시고 달과6펜스의 신화를 갉아 먹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달과 6펜스는 대학 때 읽고 최근 다시 읽어보았는데 읽히는 느낌이 판이했다. 그것이 내가 사회에 순응해 버린 결과인지, 꿈을 잃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스트릭랜드에 대한 경외감이 커진 것은 확실하다. 모든 책이 두 번 읽혀야 한다면 그 첫번째와 두번째를 언제로 하느냐에 따라 책의 가치가 극대화 될 수 있을텐데, 이 책은 사회에 발을 딛기 전에 한 번 읽고 사회 생활이 십년이 넘은 후에 한 번 읽는다면 적절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