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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좀 괜찮아지고 싶을 때

[도서] 그냥 좀 괜찮아지고 싶을 때

이두형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아프냐, 나도 아프다.”

오래 전 뭇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드라마 <다모>가 낳은 명대사이다.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 주면서 건넨 이서진의 짧은 한 마디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하지원의 모습은 지금도 이따금씩 회자되고 있다. “아프냐, 나도 아프나.” 나는 이 대사를 정말 좋아한다. 이보다 더한 공감과 위로가 있을까? 언젠가 호스피스 봉사자 분이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참, 신기하지. 내가 아무리 구구절절 좋은 말을 해 줘도 시큰둥하던 환자들이 같이 간 내 친구만 보면 눈물을 펑펑 쏟는다니까.......” 함께 봉사하러 다니는 친구는 유방암 수술로 많은 고통을 지나온 분이었는데 그녀가 말기 암 환자의 손을 꼭 잡고 “저도 암이에요.”하면 죽음의 문턱에서 두려움과 허무감으로 마음을 닫고 있던 사람들조차도 여지없이 무장 해제된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아주 험난한 길을 홀로 쓸쓸히 걷고 있을 때 문득 남루한 차림으로 털레털레 걷고 있는 나와 비슷한 행인과 마주치게 된다면, 그가 “힘들죠? 나도 많이 힘드네요.”라고 한 마디 건넨다면 그보다 더한 위로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도 그러셨다. 우리를 무작정 위로만 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셨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겪는 모든 아픔들을 기꺼이 견뎌 내셨다. 그렇기에 주님이 주시는 위로는 식상하거나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데서 머무르지 않았다. 온전한 위로가 될 수 있었다.



『그냥 좀 괜찮아지고 싶을 때』 역시 비슷하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을 하는 정신과 의사가 자신이 어려웠던 시간을 고백한다니 솔깃했다. 마음이 아파 울고 있는 이들의 회복을 돕는 위치에서 쉽지만은 않은 결단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보았다.

“정신과 의사로 산다고 해서 감정이 무뎌지는 것도,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중략) 또 정신의학은 나를 초월자, 독심술사, 구원자로 만들어 주지 않았다. 살아온 세월, 환경, 가치관이 다른 각각의 환자들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미지의 세계를 더듬는 일이었다. 그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한계, 나를 찾는 모두를 도울 수는 없다는 현실 앞에 좌절하기도 했다.”


이두형 작가는 마음에 관해 공부하면서 자신이 그토록 버거웠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 어느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고 그럴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나 혼자만 알고 간직하기에는 너무 아깝고 중요했다.

 

자신을 용기 있게 보여 주게 된 진심을 읽어 내려가면서 마음이 따듯해졌다. 저자가 견뎌 냈던 아픔을 통해 독자에게 전해 주는 위로가 있었다.


‘인지구조’, 이 책을 읽은 후 기억에 남는 단어이다. 저자는 자기 나름의 상으로 마음속에 세상을 그리는 것을 ‘인지’. 세상을 받아들이는 틀의 형태를 ‘인지구조’라고 알려 준다. 우리가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은 서로 얽혀 인지의 틀 즉 ‘인지구조’를 만들어 낸다. 문제는 힘든 경험들이 반복되면서 ‘인지구조’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뒤틀린 ‘인지 왜곡’에 있다. ‘인지 왜곡’은 자신이 겪어 온 좋지 않은 경험들을 통합해 자기 자신과 세상은 물론이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조차도 온통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안타까운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인지 왜곡’으로 고생하는 내담자들과 상담할 때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이렇게 말한다.


억지로 좋게 생각하려 하지 마세요.
대신 억지로 나쁘게 생각하려고도 하진 마세요.

 

그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좌절과 절망으로 인해 희극도 비극도 아닌 가치중립적인 삶의 다른 조각들조차 어두운 빛깔로 덮어 버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강조한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지친 그날도
구름은 아름다웠고, 노을은 아련했고,

반가운 누군가는 나를 떠올렸을 것이다.


다만 마음이 무너지면

그런 작은 고마움들을 오롯이 느끼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기 쉽다.


마치 슬픔만 더 잘 보이는 렌즈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픔과 그 아픔을 상기시킬 만한 일들만 또렷이 잘 보인다.

 

내게도 슬픔만 더 잘 보이는 렌즈를 끼고 살아온 시간들이 있었다. 지난해 겨울까지 약 3년쯤, 깊은 우울감에 빠져 지낸 날들이 있었다. 마음속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인생을 살면서 겪어야 할 괴로움이 왜 나에게만 곱빼기로 주어진 거냐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가파른 벼랑 끝에 홀로 버려진 듯 고독하고 슬픈 시간 속에서 ‘나의 인생은 불행만 주어졌다’고 정의 내렸었다. 그런데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터널 같은 시간을 통과하고 보니 당시 나의 인지구조가 엉망으로 얽혀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언제나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 무능력한 사람, 불행만 겪은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환하게 웃으며 행복해했던 날들도 적지 않았고, 나를 소중하게 여기며 아껴 주는 이들이 많았다. 나는 좋은 점이 많은 가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정처 없이 표류하면서 이전에 나를 웃게 했던 모든 순간을 완벽하게 잊은 채 온통 부정적인 일들만 빼곡하게 기억에 저장했다. 완벽한 ‘인지 왜곡’이었다.


저자는 ‘인지 왜곡’이 주는 부작용을 쉽게 설명해 준다. ‘그 친구가 나를 싫어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에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의식적으로 ‘걔가 나를 싫어하는구나’로 결론 내리는 자동적 사고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또 이런 사고는 ‘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 ‘나는 무능하다’ 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일그러뜨린다고도 했다. 그는 간절하게 권면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이유, 무능한 이유는

귀신같이 찾아내고 납득하지만

그 반대의 이유는 찾으려 노력하지도, 잘 믿지도 못한다.


살다 보면 사랑받지 못하는 일, 미움받는 일,

무능으로 인한 실패는 당연히 일어난다.

그러나 그러한 과거를 근거로

자신을 굳이 ‘그런 사람’으로 생각할 이유가 있을까.


소위 사랑받는 사람, 유능한 사람도

자주 미움받거나 실패한다.

스스로를 어떤 사람으로 간주할지는

맞고 틀림의 문제가 아닌 선택의 문제다.

삶의 여러 경험과 상관없이

나는 가치 있는 사람, 해낼 사람’으로 믿어도 된다.

 


나를 어떤 사람으로 정의 내릴지 선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내가 깊은 상실감과 슬픔을 회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사실 내가 슬픔만 더 잘 보이는 렌즈를 끼고 ‘인지 왜곡’에 시달린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유년 시절부터 오랫동안 이어진 슬픔들은 나를 만성적인 무기력함으로 인도해 주었다. 내 잘못이 아니었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는 시기와 장소, 부모와 환경을 선택할 수 없었고 불행 대신 행복을 선택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운명적으로 그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겪어야만 했고, 계속되는 슬픔으로 삐뚤어진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동안 좋은 멘토를 만날 수 있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견고하게 세워졌던 왜곡된 ‘인지구조’, 즉 일그러진 나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경우 성경 말씀을 통해 잘못된 정체성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그런 나를 위해 아들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내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비록 혼돈과 모순이 가득한 세상을 살면서 많은 슬픔을 겪었어도, 그로 인해 때때로 나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실수하고 상처를 줄 때가 있더라도 나라는 존재는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존재임을, 어떤 경우에도 나의 존재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이토록 중요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문득 세상이 전해 주는 가짜 정체성이 아닌 진짜 정체성을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내가 좀 더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하지만 지나온 삶을 되돌릴 수도 없을뿐더러 인생이 준 쓴 맛을 처절하게 시식해 보았던 지난날들도 결코 허무하지만은 않았다고 고개 끄덕인다. 나도 이두형 작가님처럼, 혹은 말기 암 환자 앞에서 고백한 누군가처럼 “나도 많이 아팠어요.”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게 이제 나쁘지만은 않다. 내가 겪어온 고통의 시간들을 일일이 나열하는 데는 아직 좀 더 용기가 필요하지만,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에게 새겨진 움푹 팬 상처의 흔적이 누군가에게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아름다운 호수가 될 수 있다고.


책의 마지막 즈음에서 마음이 뭉클해질 때가 많았는데, 자신을 바라볼 때 ‘길 잃은 막내 고양이를 대하는 어미 고양이’의 마음을 가져 보라는 저자의 이야기가 참 좋았다. 그는 우울, 불안, 초조, 공포 등 때때로 우리 자신을 괴롭히는 자신의 연약한 영역을 유독 모자란 말썽꾸러기 막내 고양이를 바라보는 어미의 고양이의 눈으로 바라보라고 권한다. 어미 고양이는 말 안 듣는 막내 고양이를 보며 ‘저것 때문에 내 인생이 이래’, ‘저것만 없었으면 삶이 참 괜찮았을 거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우울증만 없어도 참 행복할 텐데‘, ’공황만 해결되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라며 그 연약한 막내 고양이를 보듬기는커녕 오히려 쥐어박고 혐오한다. 작가는 일부러 어미를 화나게 하려 하거나 일을 망치려 드는 게 아닌 그저 좀 모자라서 우유를 쏟고 길을 잃어버리는 막내 고양이를 보듯, 흉터 난 나의 연약한 상처를 너그럽게 바라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것도 모른 채 방황하는 그 애달픈 막내 고양이에게 화를 내고 윽박질러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오히려 안아주고 핥아주고 쓰다듬어 주어야 한다고 했다. 너무나 깊이 공감되는 대목이었다. 지난날의 아픔으로 잘못된 생각과 건강하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는 내 모습을 증오한 날들이 많았다. 세상이 인정해 주지 않는 나를 스스로도 미워하고 저주했었다. 저자는 유일하게 따듯한 품으로 안아 줄 거라 믿었던 어미 고양이마저 매몰차게 다그칠 때 막내 고양이에게는 더욱 깊은 상처가 남을 수 있다고 귀띔했다. 정말 그렇다. 연약한 자신을 스스로도 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한 상처를 겪게 될 테니까.

 

이두형 작가가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건네는 처방전은 매우 현실적이고도 유익했다. 다양한 처방전이 있지만 그중에서 세 가지를 꼭 기억하고 싶다.


첫째, 세상이 자주 나를 괴롭히더라도 나 자신만은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고 보듬어 주라는 것이다. 바로 앞서 이야기한 말썽꾸러기 막내 고양이를 보듬는 어미 고양이처럼 자신을 용납하고 위로해 주라는 의미이다.


둘째, 더 나은 삶을 살게 하는 성숙한 방어기제 중 하나로 소개된 ‘승화’이다. 저자는 ‘승화’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사무치는 아픔과 분노를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내가 겪은 아픔을 다른 사람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표현된 것. 혹시 같은 고통을 겪은 이가 있다면 내 아픔과 분노가 승화된 이것이 그를 위로하기를 바라는 것.(중략) 당신에게 하늘의 축복이 있어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잔잔한 음악을 연주하거나 한 권의 이야기를 지을 수 있다면, 그 안에 당신의 갈등이나 상처를 마음껏 풀어내기를 바라본다. 혹시 나처럼 평범해 그런 재능이 없다면, 누군가가 승화로 겪은 아름다움에 위로받아도 좋겠다.”

 

바이올리니스트 박지혜 씨의 무대를 기억한다. 그 연약한 체구에서 어쩌면 그렇게 강렬하고 아름다운 연주가 나올 수 있는지 정말 경이로웠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 성공했다고 말하는 시점에 불현듯 깊은 우울증에 빠졌던 그녀, 만약 그녀가 캄캄하고 고독한 터널을 홀로 걸어본 일이 없었다면 그토록 깊은 울림을 주는 연주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살고 싶지 않을 때, 괴로울 때 그냥 글을 썼다. 너무 슬프고 괴로워서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던 결핍감을 글을 쓰며 달랬다. 이제 와 생각하면 글을 쓰면서 무의식적으로 승화의 작업을 해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의식적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승화의 작업을 이어 가고 있다. 내가 겪은 어려운 시간들과 그저 버텨 내면서 지나올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을 활자 속에 아로새겨 진심으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다.


셋째, 아무리 어려운 순간에도 현재의 소소한 행복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저자는 많은 고민과 상념이 마음을 휘젓다 보면 작은 아름다움은 잊히기 마련이지만, 그렇기에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행복에 집중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팍팍한 삶 속에서도 피어나는 들꽃들을 놓치지 않는 연습. 이를테면 월요일 출근길이라도 하늘을 바라보기, (중략) 첫눈이 오면 잠시라도 창밖을 내다보기, 비가 내리면 평소 지나치기만 했던 녹두전 집을 들러보기, 항상 곁에 있는 그의 눈을 문득 곰곰이 들여다보기 같은’ 것들을 연습해 보라고 권한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면서 내가 잊고 지낸 감사들, 지금 바로 눈앞에 펼쳐진 사랑스러운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나태주 시인이 말했듯이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온통 내 주위를 감싸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만약 별안간 나의 마음에 또 다시 혼돈이 찾아오더라도, 그때는 이 지구별을 여행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 내게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싶다. 비록 과거에 나를 짓눌렀던 일들이 너무나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경험들이었대도, 그것은 살아 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내가 슬픔에 잠겨 있는 동안 가장 후회가 남는 일은, 가까운 이들에게 좀 더 솔직하게 나를 보여 주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화 한 통만으로도 나의 손을 꼭 잡아 줄 사람들이 충분이 많았음에도, 가파른 벼랑 끝에 홀로 버려진 듯 고독한 시간을 보냈다. 몸이 아플 때 병원을 찾듯이 마음이 아플 때도 나를 도울 수 있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찾는 일은 꼭 필요한데 말이다. 그런 존재는 저자와 같은 정신과 의사가 될 수도 있고, 가족과 친구가 될 수도, 귀감이 되는 멘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행히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졌다고들 하여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나를 향해 내미는 누군가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쯤은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아직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기에는 조금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꼭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냥 좀 괜찮아지고 싶을 때』에 담긴 정말 돕고 싶어 하는 진심과 오랜 시간 마음을 공부하며 체득한 깊은 통찰력이 분명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의 주위에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도 과거를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이 책을 선물해도 좋겠다.


사람을 향한 저자의 진심어린 마음 덕분에 모처럼 뿌듯하고 따듯한 독서를 누릴 수 있었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예정되어 있을지 모를 이두형 작가의 다음 책이 몹시 기대된다. 한 문장, 한 문장마다 깊은 사색이 없이는 써 내려갈 수 없는 울림이 느껴졌다. 그동안 글을 쓰지 않고 어떻게 살았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을 하는 저자의 경험들, 타고난 필력, 여기에 진실한 마음까지 더해져 왠지 앞으로도 계속 그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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