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리버 트위스트』에 대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으니, 책을 읽으신 분들이나 줄거리를 알아도 괜찮은 분들만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는 19세기 영국을 살았던 인간의 꿈을 담고 있다. "문학은 꿈이다."(김현) 모든 문학 작품은 유토피아를 지향한다. 문학은 인간이 발붙이고 있는 사회문화적 현실에 대한 무의식적 반작용인 동시에 문학적 유산의 전통을 시대와 결합시키는 연금술이다. 디킨스의 소설을 끝까지 읽다 보면, 거대한 서사가 엮이는 필연성의 틈에서 '무의식적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그 틈에 '정의(正義)에 대한 요구'라는 추상적인 이름을 붙여보았다. 이 글은 정의에 대한 요구라는 본질이 작품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밝히는 데에 목적을 둔다.
현실에 대한 신랄한 풍자
『올리버 트위스트』의 제1부는 올리버의 출생과 고난에 찬 삶을 묘사하는 데에 바쳐진다. 올리버는 구빈원에서 태어나 고아로 성장한다. '아동 농장'에서 양육되는 그는 일상적으로 구빈원의 선생님에게 얻어맞고, 늘 부족한 식사 때문에 항시적인 배고픔, 무기력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죽을 더 달라고 주방장에게 요구했다가 독방에 갇히고 천하의 악당이라며 온갖 모욕을 당하는 신세가 된다. 1부에서 친절한 브라운로 씨를 만나기 전까지 구빈원에서 빌붙어 사는 고아로 멸시당하고, 공개적으로 인신매매되며, 자기 잇속만 챙기는 어른들의 탐욕에 이용당한다. 그는 부조리한 현실 앞에 무력한 약자이다.
독자는 올리버의 처지에 안타까워하며 추악한 현실을 대변하는 인물에게 역겨움을 느낀다. 만약 작가가 현실적으로 올리버의 삶을 묘사하면서, 오로지 진지한 태도로 추악한 현실을 정직하게 묘사한다면, 독자는 페이지를 넘길 용기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올리버에게는 든든한 우군이 있으니 바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서술자다. 그는 구빈원 교구관 럼블의 이중적 면모를 신랄하게 비꼬고 페이긴을 '친절한 노인'이라고 반어적으로 묘사한다. 죽 한 그릇을 더 달라는 요구에 올리버를 가혹하게 다루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비아냥거리는 서술적 특성이 전형적으로 확인된다.
이 구빈원 ‘체제'의 반대자들이더라도, 올리버가 독방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 운동과 사회적 활동이나 종교적 위안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을 것이라는 억측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운동으로 말하자면, 날씨가 적당히 쌀쌀해서 아침마다 돌바닥 마당의 펌프 아래에서 세수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 옆에는 범블 씨가 딱 버티고 서서 지팡이를 들고 반복적으로 올리버를 내리침으로써 감기를 예방하고 뼛속까지 따끔한 느낌이 스며들도록 배려했다.
사회적 활동으로는, 이틀에 한 번꼴로 아이들이 배식을 받는 넓은 식당으로 끌려 나가서 공적인 경고와 본보기로 공개매질을 당했다. 그리고 종교적 위안이라는 혜택을 제한당하기는커녕, 저녁마다 기도 시간에 똑같은 식당에 강제로 들여보내져서 동료 아이들의 공동 기도문을 들으며 위안을 얻는 것이 허락되었다. 공동 기도문에는 이사회가 직접 삽입한 특별 조항이 담겨 있었는데, 내용인즉슨, 우리 모두를 착하고 덕스러우며 만족하고 순종하게 해주시고 올리버 트위스트의 죄와 사악함으로부터 보호해주시라는 것이었다. 이 기도문은 올리버가 사악한 세력의 전적인 후원과 보호 아래 있는 존재이며 악마의 공장에서 바로 나온 불량품이라는 점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39쪽)
서술자는 구빈원 체제를 겉으로 찬양하는 체하면서 올리버를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학대하는 정황을 고발하고 있다. 언어적 아이러니의 이중성은 구빈원의 이중성과 흥미롭게 조응한다. 구빈원은 약자와 빈자를 사회적으로 구제한다는 명분 이면에서 약자를 착취하는 국가의 권력 장치로 작동한다. 서술자의 반어적 서술은 이면적 착취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 허울 좋은 명분을 덧씌워 우스꽝스러움을 유발한다. 올리버가 처한 안타깝고 비참한 상황은 풍자 덕분에 비극적이지는 않다. 이것이 19세기 영국의 모순적 사회와 디킨스가 창조한 작품 세계의 차이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세계는 19세기 영국 사회의 단면을 가져오면서도 변형을 가하고 있다. 극빈자들이 국가의 보호라는 명분 아래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모순은 소설의 작품 세계 속에서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도 풍자적 힘으로 굴절된다.
특히 소설의 제1부에서 구빈원과 관료를 향한 풍자는 날카롭다. 페이긴과 같은 비열한 인간보다도 높은 자리에 있는 관료나 판사에 대한 공격성이 더 강렬하다. 디킨스는 올리버와 같은 사회적 약자의 불행을 구조화한 자들이 바로 그들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들은 권력에 취해 있어 도대체 현실감각을 갖지 못하며, 자기가 듣고 싶은 말 외에는 모든 의견을 묵살하고 무시한다. 치안판사 팽은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관료로서 서술자의 풍자 전략이 없이도 부정적 면모를 스스로 드러낸다.
“저 아이를 고소하러 나온 거라고, 맞아? 선서 시켜!" 치안 판사는 브라운로 씨를 경멸하는 눈초리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으며 명령했다.
“선서하기 전에 한 마디만 해야겠소.” 브라운로 씨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난 실제로 이런 일을 겪기 전에는 믿을 수 없었는데..."
“입 다무시오, 선생!” 치안 판사가 위압적으로 말을 끊었다.
“못 다물겠소!” 노신사가 대차게 반박했다.
“당장 입을 다물지 않으면 법정 밖으로 내쫓을 거요! 당신 아주 무례하고 뻔뻔스러운 사람이군, 어디 감히 치안 판사한테 대들고 있어!"
치안 판사가 언성을 높였다.
“지금 뭐라고 했소!” 노신사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이 사람 어서 선서 시켜! 다른 말은 듣지 않겠어. 선서시키라고.” 치안 판사가 법정서기에게 명령했다.
브라운로 씨는 엄청나게 화가 났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성을 내버리면 저 아이에게 해로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억지로 화를 누르고, 당장 선서를 하겠다며 한 발 물러섰다.
“자, 저 아이의 혐의가 무엇이오? 뭐 할 말이라도 있소, 선생?" 치안판사가 물었다.
"내가 책방에 서 있는데,"
브라운로 씨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잠깐, 입 다무시오, 선생. 경관! 경관 어디 있나? 자, 경관, 선서하게, 어서 말해봐, 무슨 일인지.” 치안 판사가 성급하게 말을 자르며 명령했다.(125쪽)
우연이 구원에 이르는 권선징악적 서사
혈혈단신 고아인 올리버는 브라운로와 로즈와 같은 선량한 인간을 우연히 만나 구원 받는다. 놀랍게도 올리버를 처음 도와준 브라운로는 올리버 아버지의 친구이다. 사익스의 강요로 접시를 훔치기 위해 들어선 저택이 하필이면 올리버의 이모격이 되는 로즈의 집이었다. 그들은 올리버의 정체를 알지 못했을 때도 대가 없이 올리버를 도와준다. 브라운로는 올리버를 소매치기로 오해하지만 올리버에게 연민을 느끼면서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열병을 치료해 준다. 로즈는 집에 침입했다가 총상을 입은 올리버를 가여워하며 적극적으로 돌본다. 올리버는 타인의 절대적 환대가 없으면 아수라와 같은 악의 세계(페이긴과 사익스가 활동하는 이기적인 욕망의 세계)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2부에서 사익스가 올리버를 이용해 도둑질을 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올리버가 로즈의 집에서 안전해지는 순간부터 소설은 달라진다. 올리버를 이용하려고 했던 페이긴, 사익스가 점차 몰락해 가는 과정과, 올리버의 배다른 형제 멍크스의 등장으로 올리버의 정체가 밝혀지는 3부 결말 부분에 이르는 과정은 서사의 수레바퀴가 역동적으로 굴러간다. 1부의 동력이 되었던 풍자적 성격이 약화되고 대신 사건의 연쇄가 전면에 들어선다. 영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문제 제기했던 사회적 성격은 선악의 이분법이 지배하는 도덕적 세계관으로 대체된다. 페이긴이 그토록 올리버에게 집착했던 까닭은 그가 하층민으로서 아이들을 이용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삶의 양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멍크스가 사주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회적 성격을 상실하고 오히려 개인적인 악덕이 부각된다. 사익스는 도둑질로 연명하는 하층 계급이며 페이긴과 동업하는 관계이면서도 집요하게 사익스를 멸시한다. 그는 개성적인 인물로서 사회적 현실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낸시를 살해하면서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사적 성격이 부각되고 낸시의 죽음 이후로는 개성을 상실한다.
권선징악 모티프가 소설의 후반부를 지배하면서 소설은 통속화된다. 이에 따라 올리버는 한없이 착한 아이로 묘사될 수밖에 없다. 디킨스는 소설의 머리말에서 낸시와 사익스의 비현실성을 변호하고 있는데, 오히려 21세기의 독자인 내가 보기에 가장 현실성이 없는 캐릭터는 다름 아닌 올리버이다. 1부의 올리버는 장의사인 소어베리에게 팔리면서 구빈원을 벗어난다. 범블과 함께 소어베리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그는 흐느껴 운다. "전 너무 외로워요. 진짜 외롭다구요!"(57쪽) 소어베리의 집에 머물면서 노아 클레이폴의 구박을 받던 올리버는 인내심이 극에 달하자 클레이폴을 때려 눕히고, 그 때문에 방에 갇히고 만다. 올리버는 거칠게 문을 발로 차면서 자신을 내보내 달라고 말한다.
"올리버!”
“당장 날 꺼내줘!” 안쪽에서 올리버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 목소린지 알겠느냐, 올리버?” 범블 씨가 물었다.
"그래.” 올리버가 대답했다.
“이 목소리가 무섭지도 않느냐? 내가 말하는 동안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지?” 범블 씨가 추궁했다.
"아니!” 올리버가 대담하게 반박했다.
범블 씨는 늘 들어오던 유순한 대답을 기대하고 있다가 허를 찔린 듯 주춤하고 말았다. 열쇠구멍에서 뒤로 물러나 허리를 곧게 편 후, 아무 말 없이 경악한 표정으로 세 사람의 구경꾼을 둘러보았다.
"오, 범블 씨, 저 녀석이 미친 게 틀림없군요. 정신이 반만 있어도 감히 저렇게 말하진 못할 텐데요.” 소어베리 부인이 말했다.
“부인, 저건 미친 게 아닙니다.” 범블 씨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고기 때문입니다.”
“뭐라고요?" 소어베리 부인이 놀라며 물었다.
"고기요, 부인. 고기.” 범블 씨가 엄중하게 강조하며 대답했다. “부인이 너무 잘 먹인 탓이지요. 저 녀석의 처지에 전혀 맞지 않는 대접으로 인해 기운이 넘치게 된 겁니다. 실용적인 철학자이신 이사님들도 동의하실 걸요? 도대체 극빈자 놈들이 기운이 넘쳐서 뭐에 쓰겠어요. 그저 몸뚱어리나 부지하면 그만일 텐데, 저 녀석한테 죽이나 먹였으면 이런 일은 안 일어났을 겁니다.”(86쪽)
외롭다고 절규하고, 부당한 처우에 저항하는 올리버는 현실적이다. 구빈원에서 조금도 사랑 받지 못한 채 자란 소년은 고독한 실존과 거친 심성을 형성할 수밖에 없으며, 자신을 억압하는 현실원칙에 저항할 것이다. 페이긴이 키우는 미꾸라지와 찰리 베이츠가 브라운로의 손수건을 소매치기하는 장면을 보고 올리버가 기겁하는 장면까지도 올리버의 착한 성정으로 미루어보아 개연성을 갖는다. 그러나 2부에서 3부로 넘어갈수록 올리버는 자기 욕망을 실현하고 저항하는 능동성이 거세되고 오로지 타인의 선행에 감읍하는 '착한 아이'로 변해간다.
올리버는 집 쪽으로 돌아서서 로즈 아가씨에게 받은 친절한 은혜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면서 로즈 아가씨에게 얼마나 많은 고마운 마음과 애정을 간직하고 있는지를 보여줄 기회가 다시 오기를 기원했다. 가시 그동안 올리버는 로즈 양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했기 때문에 태만하거나 생각이 모자랐다고 자책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그렇지만 올리버의 머리 속에는 좀 더 열성적이고 진지했으면 좋으리라 싶은 자잘한 일들이 수백 가지나 떠올랐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을 대할 때 더욱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모든 죽음의 끝에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죽은 이에게 못해준 일들이나 깜빡 잊어버린 일들, 갚아야 하는 은혜들이 수없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허망한 회한만큼 더 깊은 회한이 없지 않은가! 이러한 고통을 피하고 싶다면 우리 모두 살아 있을 때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370쪽)
올리버는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충만하다. 여기에는 개인의 욕망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올리버의 내면은 선량함으로 채워진다. 이것은 실존적 선택에 기반한 윤리가 아니라 외적으로 강제된 도덕이며 이데올로기이다. 위에 인용된 서술자의 어조 변화는 괄목할 만하다. 신랄했던 어조는 자취를 감추고 올리버의 내면을 정당화하는 설교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일상과 현전의 삶 속에서 재확인 되는 이데올로기이다.
"난 한동안 집에 오지 못할 거야. 네가 내게 편지를 보내줬으면 좋겠구나. 어디 보자, 2주일에 한 번씩 월요일마다 런던 중앙우체국으로 말이야, 괜찮겠니?"
"아! 물론이죠. 오히려 제가 영광이에요." 올리버는 커다란 임무를 받은 양 뛸 듯이 기뻐하면서 외쳤다.
"어머니와 로즈 양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주렴. 간략하게 그분들이 어디로 산책을 나가 어떤 얘기를 하고, 로즈, 아니, 그분드링 행복하게 잘 지내는지를 써서 보내주면 돼, 알겠니?"
"아, 네, 잘 알겠어요."(396쪽)
올리버가 악의 세계로부터 안전해질수록 올리버는 평면적으로 된다. 이제 남은 일은 올리버를 악의 세계에 빠뜨리려 했던 악당에 대한 처벌과 착한 마음씨를 간직한 올리버의 예정된 행복 뿐이다. 대중의 욕망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세계관은 비참한 현실을 가리는 양식화의 다른 버전이다. 2부를 기점으로 전반부는 풍자적 서술이, 후반부는 권선징악의 서사가 소설을 이끈다. 풍자와 이분법적 세계관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를 갖는다. 한쪽 면을 바라보려면 다른 쪽이 은폐되어야 한다. 하나의 원형이 두 가지 현상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 원형이 바로 '정의에 대한 요구'이다. 작가가 직조한 서브텍스트도 이에 기반한다. 정의에 대한 요구를 모순적으로 실현하고 있는 문제적 인물이 낸시다.
낸시, 문제적 인물
낸시는 사익스의 정부(情婦)다. 최초로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하류 계층의 전형적인 언행과 용모를 보이는 것으로 묘사되고, 특이점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는 브라운로의 책 심부름을 가는 올리버를 발견하고 붙잡는다. 올리버를 다시 불행의 수렁에 몰아넣는 낸시는 올리버를 페이긴에게 데리고 가면서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다. ""불쌍한 녀석들!" 낸시가 여전히 종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아, 빌, 저렇게나 괜찮은 어린애들이!""(181쪽) 낸시는 감옥 안에 갇힌 어린아이들에게 감상적으로 연민의 감정을 토로한다. 낸시는 올리버를 다시 악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이 불편하다. 페이긴에게 끌려간 올리버가 탈출을 시도하자 낸시는 이렇게 외친다. "개가 아이를 물어뜯게 놔두면 안 돼. 날 먼저 죽여."(187쪽) 낸시가 올리버에게 연민을 느끼는 까닭은 낸시가 페이긴에게 퍼붓는 저주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난 똑같은 짓거리를 12년이나 쭉 해온 거야. 그걸 몰라? 말해봐! 정말 모르냐고?"
"그래, 그래. 그래도 그게 네 밥벌이잖아!" 유대인 노인이 달래듯 말했다.
"그래 , 맞아!" 낸시는 말을 한다기보다 단어를 비명처럼 연속적으로 쏟아내듯이 퍼붓기 시작했다. "그게 내 밥벌이야! 춥고 축축하고 더러운 길거리가 내 집이지. 당신이 날 그렇게 오래전에 길거리로 내몬 악당이잖아. 그리고 내가 죽을 때까지 밤낮으로 그 길거리에 묶어둘 놈이지!"
"그쯤 해둬, 더 화를 입기 전에!" 유대인 노인이 화가 나서 끼어들었다. "더 이상 지껄이면 가만두지 않겠어!"
낸시는 입을 다물었지만 분을 이기지 못하고 머리와 옷을 쥐어뜯으며 유대인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때마침 사익스가 낸시의 손목을 잡아 챘고, 낸시는 부질없는 난동을 부리다가 기절해버렸다. (190쪽)
현실성이 살아 있는 2부까지 낸시는 문제적이다. 그녀는 의식적으로는 주어진 배역(무뢰배)에 충실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그 배역을 거부한다. 낸시가 난동을 부리고 기절하는 것은 일종의 방어 기제다. 3부에서 낸시는 올리버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는 결정적 역할을 해 낸다. 페이긴과 멍크스의 대화를 엿듣고 그 정보를 목숨 걸고 로즈에게 알려준다. 사익스는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하여 낸시를 살해하고 만다. 로즈는 낸시에게 사익스로부터 벗어나라고 여러 차례 제안하지만 다시 사익스에게로 돌아간다. 그녀는 착하게 살고 싶지만 착하게 살 수 없고, 자신에게 주어진 가면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 가면을 벗어버리고 싶어한다. 찢겨지고 분열된 존재로서 낸시는 오히려 올리버보다도 생생한 개성을 지녔다. 그녀가 사익스에게 살해 당하는 순간 기도를 올리는 듯한 행동을 취하는데, 이는 순교의 세속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낸시는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깊이 찢겨진 이마 상처에서 빗물처럼 피가 쏟아져서 거의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힘겹게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 앉은 후 품안에서 로즈 양의 흰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더니 마주잡은 손으로 미약하나마 높이 손수건을 들고 창조주에게 자비를 구하는 기원의 한마디를 속삭였다.(525~526쪽)
낸시를 순교자로 묘사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디킨스는 성스러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디킨스에게 성스러움이란 다름 아닌 정의이다. 정의에 대한 요구는 그것이 좌절될 때 부조리한 현실 묘사와 풍자로 나타나고, 그것을 꿈꿀 때 권선징악의 서사 운동이 된다. 분열되고 찢긴 낸시는 소설의 전반부와 호응하고, 순교자 낸시는 후반부에 걸맞다. 정의에 대한 요구는 작가가 소설 세계를 만들어가는 토대로서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그것은 디킨스만의 것이 아니라 그의 소설을 읽은 당대 독자들의 꿈이기도 했다.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던 영국 사회에서 부르주아가 아닌 계급의 독자들은 디킨스의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이기주의와 권위주의에 가득찬 지배계급의 위선을 조롱하면서, 올리버처럼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 행복해야 한다는 민중의 요구가 디킨스의 상상력과 만나 『올리버 트위스트』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