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신비하다. 나는 어째서 살아가는 것일까? 매일 주어진 일상을 당연한 듯 지내다가도 문득 내가 죽는다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하는 때가 있다. 죽음은 그냥 편안한 잠일까? 영원한 의식불명인 걸까? 궁리해보아도 알 수 없고 체험할 수 없다. 죽음은 궁극의 타자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다가 떠오르고 이내 잊혀진다. 어쩌면 나의 무의식은 생각을 회피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는 죽음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것을 잊고 산다. 그래서 다시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내일이 이어질 것처럼 하루를 산다.
『스토너』는 일상 속에서 흔히 잊어버리는 죽음을 일깨워준다. 소설의 마지막에 스토너를 대신하여 서술자가 반복하는 독백 '너는 무엇을 기대했나'는 결국 모든 인간은 종국에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경구는 이 소설의 주된 테마를 설정하고 있다. 소설 속 인물 스토너가 태어나고 자라서 진리의 세계에 눈을 뜨고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직장 생활을 하고, 자식을 키우고, 고독을 느끼고, 강렬한 사랑을 느끼고, 악연으로 얽혀 갈등하고, 병에 걸리고, 노쇠해지고, 결국 죽는 과정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압축해 놓은 것 같다. 책을 다 읽은 독자는 묘한 페이소스에 빠져든다. 그의 생을 지켜봤다가, 응원했다가, 뭔가 허무해지는 기분에 침잠된다. 스토너의 일생에 대해서 우리는 양가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데, 그것이야말로 저자가 기대했던 독서 효과로 보인다.
나는 이 작품이 대중적으로 주목 받고 많은 작가들의 호의적인 서평을 얻어낸 현상에 대해서 약간의 거리를 두고자 한다. 독서 후에 나는 스토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혼란스러워 당장 서평을 쓰지 못했다. 『스토너』를 감명깊게 읽은 분들에게 이 글이 어떻게 읽힐지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스토너의 삶에 깊이 감정이입하고 그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했음을 먼저 고백하고 싶다. 하지만, 이 작품의 한계를 모른 척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안이나 위로보다는 전쟁 같은 사랑임을, 세상을 바꾸는 실천임을 믿기 때문이다.
스토너는 보편적 인간인가
스토너는 시골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그는 하층 계급 출신임에도 부모의 헌신으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부모는 그가 가업을 물려받아 확장시킬 농업기술을 배우기 바랐지만, 그가 새롭게 눈 뜬 것은 학문과 문학의 세계다. 그것은 대학에 대해 잘 모르는 부모의 오판이 낳은 결과였으나 결과적으로 스토너가 중간 계급으로 진입할 기회가 된다. 스토너는 전형적인 지식인, 대학 교수로서 살아간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라는 거대한 역사가 그가 사는 생활 세계를 할퀴고 지나가지만 스토너는 시류에 영합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 학문적 진리에 헌신하는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스토너의 용모에 대한 언급 중에서 구부정한 어깨는 암시적이다. 보통 구부정한 어깨는 세속인의 시선으로 봤을 때 결격의 표지다. 세상은 어깨를 펴고 당당한 태도를 요구한다. 그러나 스토너는 세상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나이를 먹을수록 어깨가 점점 더 구부정해지고 고집스러워진다. 세련된 매너나 능숙한 화술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는 자신의 본성을 배반하기보다는 고수하면서 세상을 살아간다. 대학 교수는 그러한 삶의 방식이 허락되는 몇 안 되는 자리다. 누구나 '구부정한 어깨'는 있게 마련이다. 세상이 들이미는 잣대에 미묘한 거부감이나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사춘기는 그러한 저항이 극심한 시기이다. 대부분은 '구부정한 어깨'와 '당당한 어깨'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아 살아간다. 스토너의 구부정한 어깨는 매력적 기표가 아니지만 누구나 내밀하게 지키고 싶었던, 현재는 상실한 본성의 일부를 환기시킨다.
스토너는 열정과 무력감이 교차되는 삶을 산다. 학문적 열정에 이끌려 박사과정을 결정하면서, 부모의 실망하는 모습을 견뎌야 했다. 이디스를 보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결혼하지만 이디스와 평생 불화하면서 편안하지 못한 가정 생활을 이어간다. 캐서린 드리스콜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으나 세상의 관습이 개입하면서 이별의 고통을 경험한다. 종신 교수가 되고, 훌륭한 교육자로서 자신의 자질을 발견하며 기뻐하지만, 하나뿐인 딸 그레이스를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필생의 연구 성과가 담긴 책을 한 권 썼으나, 그리 주목 받지는 못한다. 고든 핀치 같이 자신을 알아주는 동료 교수가 있는 한편, 맹목적으로 스토너를 미워하는 로맥스 교수가 영문학과에 함께 있다. 서술자를 매개로 스토너가 매 순간 느끼는 감정에는 기쁨과 슬픔이 엇갈리고, 존재와 무가 빛과 그늘처럼 병존한다. 그는 자기 삶을 이끌어갈 힘이 있지만, 타인에게 무기력하다.
지금까지 서술한 스토너의 이력은 전형적인 소시민적 삶의 양식을 보여준다. 그는 대학 교수라는 종신직에 고용되어 먹고 사는 문제로 어려움에 직면하지는 않아도 그의 봉급은 6천 달러에 달하는 저택을 감당할 만큼 넉넉하지도 않다. 농민 출신 부모는 그에게 경제적인 힘을 보태주지 못한다. 스토너가 살아가는 생의 이력들, 슬픔과 기쁨이 균형을 이루는 양상은 사회적 권력이나 부나 명예가 적당히 주어져 있는 자의 운명이다. 이디스가 스토너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것도 그녀의 허영을 채워줄 만큼 스토너가 부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것 역시 스토너가 룸펜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는 슬픔보다 기쁨을 크게 느끼고 살 것이다. 자본가라고 왜 슬픔이 없겠는가. 하지만 모든 선택에서 상류층은 만족과 쾌락의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진다. 반면 빈자는 생애를 통틀어 기쁨보다 슬픔이 더 크다. 그들은 일상에서 차별의 공기를 들이키고 선택의 순간마다 낭패를 맛보기 쉽다. 부와 권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토너』의 서평들을 살펴보면 주인공 스토너를 소시민으로 보기보다는 '인간'으로 보려는 시선이 다수다. 신형철은 "이 소설에 대해선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나는 제대로 시작조차 할 수 없다. 눈물이 나도록 기쁜 날들과 웃음이 나도록 슬픈 날들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모두 저 속절없는 0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스토너처럼, 삶이라는 서술어의 보편 주어 같은 이 사람 윌리엄 스토너처럼."(395쪽)이라고 독후감을 쓰고 있다. 허연은 독후감 말미에 "그렇다. 우리는 그저 살 뿐이다. 우리는 모두 스토너다."(매일경제신문, 2022년 2월 26일)라고 적었다. 스토너를 '인간' 보편으로 환원하려는 시선은 글쓴이의 무의식적 욕망을 반영한다. 아마 독후감을 쓴 이들이 모두 스토너처럼 문학을 사랑하고,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남성, 대학교수 혹은 기자이기 때문에 공감의 폭이 컸으리라. 기쁨과 슬픔이 0으로 수렴하는 생을 인간 보편으로 놓을 때, 그들은 자신의 삶을 보편의 무대로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기쁨과 슬픔의 대차대조표에서 슬픔을 빚처럼 더 크게 끌어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저 필자들의 시선에서 보이지 않는 타자가 된다. 소설은 독자에게 스토너가 보편적 인간상을 보여주는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킨다.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죽음의 재현 혹은 허무주의
스토너의 삶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소설 형식에 대답의 단서가 있다. 소설의 서술자는 스토너가 아니지만, 스토너의 내면 세계를 충분히 서술하는 초점-화자이다. 스토너의 감정과 생각, 스토너의 시선에 잡힌 세계의 풍경은 세밀하게 묘사되면서 마치 스토너와 서술자가 동일인물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늦가을의 쌀쌀함이 그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창백한 하늘 아래 둥글게 말리거나 비틀려 있는 나무들의 벌거벗은 가지가 보였다. 수업에 들어가려고 서둘러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학생들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이 중얼거리는 소리, 돌로 포장된 길에 신발이 또각또각 닿는 소리가 들리고, 추위에 발갛게 변한 채 가벼운 산들바람을 피해 수그린 얼굴들이 보였다. 그는 호기심에 차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들이 자신과 아주 멀지만 또한 아주 가까운 존재인 것 같았다. 그는 이런 느낌을 간직한 채 서둘러 다음 강의에 들어갔다. 토양화학 교수가 강의를 하는 동안에도 필기하고 외워야 할 내용을 불러주는 단조로운 목소리에 맞서 그 느낌을 간직했다. 이 강의의 내용을 외우는 고된 과정이 점점 낯설게 보이기 시작했다.(21쪽)
인용문은 영문학개론 시간에 아처 슬론으로부터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 대한 감상을 질문 받은 스토너가 그에 대답하지 못하고 강의실을 나온 뒤의 정황을 묘사한 것이다. 분명 서술자는 '그'라고 언급하지만, '그'가 빠져 있는 문장은 스토너의 목소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서술자는 스토너와 밀착되어 있다. '그'를 '나'로 바꾸어도 자연스럽다. 초점-화자는 초점화되는 인물에게 공감적 태도를 보여주면서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초점화된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역자가 언급하듯 윌리엄스의 문체는 수수한 편이다. 장식이 많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상이나 움직임을 간결하게 말한다. 문장은 사태를 충실하게 재현한다. 『스토너』를 읽으면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장면들이 시각적으로 떠오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서술자가 펼치는 담론은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서술된다. 명료하고 정확한 문장은 재현에 기여한다. 독자는 스토너의 내면과 시선으로 포착되는 세계를 생생하게 수용한다. 어느새 독자는 스토너에게 깊이 공감하고 무장해제되는 것이다. 작가는 노련하게 리얼리즘을 전략적으로 활용한다.
스토너의 삶에 주저음처럼 출몰하는 죽음 혹은 무의 감각은 스토너의 생에 리얼리티를 더해준다. 1장에서 스토너의 나무집에 쌓이는 '먼지'는 삶에 침입하는 황량함, 죽음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 "칠을 하지 않은 바닥 널은 간격이 고르지 않았고, 낡아서 갈라진 틈새로 끊임없이 먼지가 새어들어 왔기 때문에 매일 스토너의 어머니가 비질을 했다."(8쪽) 죽음은 한 문장으로 정리되어 무덤덤하고 무표정하게 묘사된다. "그는 1918년 봄에 박사학위 필수과정을 모두 마치고 그해 6월에 학위를 받았다. 그보다 한 달 전, 장교 훈련학교를 거쳐 뉴욕시 바로 외곽의 훈련소에 배치된 고든 핀치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가 여가 시간을 이용해서 컬럼비아 대학에 다니는 것을 허락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그곳에서 그 역시 박사학위 필수과정을 그럭저럭 마치고, 여름에 그곳 사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될 예정이라고 했다. 편지에는 또한 데이브 매스터스가 프랑스로 파견되었으며, 입대한 지 거의 1년 만에 미국의 첫 작전에 참가했다가 샤토 티에리에서 전사했다는 내용도 있었다."(55쪽) 스토너가 '무'의 세계를 감각적으로 감지하는 장면도 있다. (실존주의에서는 그것을 '불안'이라고 명명했다.) 양육 주도권을 이디스에게 빼앗겨 그레이스와 관계가 소원해지고, 대학에서도 불성실한 워커에게 심사 자격을 주지 않으려는 자신의 시도가 좌절되면서 무기력감에 빠져 있을 때의 장면이다.
열린 창문을 향해 몸을 기울이자 겨울밤의 침묵이 들려왔다. 섬세하고 복잡하며 조직이 성긴 눈(雪)이라는 존재에 흡수된 소리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하얀 풍경 위에서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죽음 같은 풍경이 그를 잡아당기고, 그의 의식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공기 중의 소리를 끌어당겨 차갑고 하얗고 부드러운 눈 밑에 묻어버릴 때처럼. 그는 자신이 그 하얀 풍경을 향해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한없이 펼쳐진 하얀 풍경은 어둠의 일부가 되어 반짝였다. 그것은 높이도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의 일부였다. 순간적으로 그는 창가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는 몸에서 자신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그러니까 그 하얗기만 한 풍경과 나무들과 높은 기둥들과 밤과 저 멀리의 별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작고 멀어 보였다. 마치 그것들이 무(無)를 향해 점차 졸아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등 뒤에서 라디에이터가 쩡 하는 소리를 냈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251쪽)
죽음은 직접적으로 소설 속에서 돌출되고 묘사된다. 다시 말해 살면서 문득 찾아오는 죽음에 대한 상념, 소식, 이미지가 재현된다. 인물들이 죽음을 직접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재현이 곧 실재는 아니다. 오히려 실재는 재현 너머에 있으며, 그 바깥에 있다.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지점, 균열과 파열과 상처로 드러나는, 광기나 위반에 가까운 바깥. 죽음이라는 타자는 그런 기괴한 모습으로 유령처럼 출몰하는 것이다. 재현되는 무기력과 죽음은 '생명이 있는 존재는 누구나 죽는다'는 자명한 진리 이상을 일깨워주지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 속에서 문득 떠올리는 죽음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토너가 우리에게 감동을 줄지언정 충격을 주지 않는 것은 재현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삶의 허무까지도 충실하게 재현한다.
긍정적 니힐리즘과 재현 너머의 유토피아
출간된지 50년이 지나서야 베스트셀러가 되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절정에 도달한 지금은 누구나 반쯤은 냉소적 허무주의를 품고 있다. 냉전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이념도, 국가 이데올로기도 빛이 바랜 지금, 가치가 빠진 자리에 허무주의가 자리잡고, 허무주의를 달래주는 각종 매커니즘이 쾌락을 소비하는 형태로 순환 중이다.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처럼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스토너는 자신의 과거이자 현재이고 또 미래일 수 있는 것이다. 열심히 살고 있지만 이미 어느 지점에서 적당히 타협하면서 무기력해져 있는 자신의 면모를 스토너에게서 발견하고 위로를 얻는다. 스토너처럼 진실한 인간에게도 무기력한 면이 있었으니, 인생은 원래 저런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스토너가 알리바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스토너가 보편적 인간처럼 보인다면, 재현 장치에 의한 착시 때문이다.
스토너는 여성과의 관계에서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인다. 이중적이고 허영심에 차 있으며, 한 번도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는 이디스 앞에서 스토너는 속수무책이다. 그레이스와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를 맺지만 이디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서는 그레이스의 내면이 붕괴되는 동안에도 개입하지 못한다. 캐서린과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어도 사회의 관습과 시선이 개입해 들어오자 캐서린을 떠나보낸다. 스토너의 무기력은 징후적이다. 아내와 자식과 연인과의 관계에서 성공적이어야 할 사랑은 부재하고 사회적 지위에 따라 맺어진 관계만이 남아 있다. 만약 스토너가 비난 받아야 한다면 실패해서가 아니라 포기해서 그렇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다. 그것은 허무주의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죽기 전까지 모든 인간에게는 주어진 과업이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사랑하기 위함이다. 사랑은 상대에게 내가 가진 것을 기꺼이 주는 것이다. 상대는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랑은 상대를 충만하게 하고, 기쁘게 한다. 결국 도움을 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타자에게 도움이 되기 위함이다. 스토너도 대학 교수로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을 테지만, 자기 세계를 지키기 위해 특정 관계를 단절해 버렸다. 그런데 그 특정 관계란 다른 사회적 관계로 대체불가능한 영역이다. 스토너는 사랑의 능력(스토너와 캐서린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에로스적 사랑에 국한된 의미가 아니다)을 상실하고 왜소해진 현대인을 대변한다. 하지만 그가 인간의 보편적 형상은 될 수 없다. 스토너는 스토너다. 우리는 스토너가 아니다. 우리는 각자 주어진 관계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 뿐이다. 이 지점에서 출발해야 인간 보편에 대한 환상은, 특정 계급만 인간으로 취급하는 편협성은, 깨진다.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 다른 삶을 꿈꿀 권리를 되찾고 끊임없이 자기를 변화시키는 도정에 서기. 죽음에 침잠하기보다는 다시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니체). 진정한 삶은 지금 여기에 있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이것이 긍정적 니힐리즘이며, 현대인이 상실한 유토피아의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