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 폭력의 재현
근대의 기점을 흔히 산업혁명으로 설정한다. 문명은 지속적으로 자연과 멀어져 왔지만, 자연을 본격적인 착취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근대 이후이다. 근대는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문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시대 규정이며,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궁극적 목표는 자본의 축적이다. 자본을 가능케 하는 잉여가치는 자연 자원의 개발과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을 결합하는 과정에 발생하는 착취 메커니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니까 근대 이후 사회는 자연에 대한 착취,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착취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산업혁명은 자연을 탈신비화하는 동시에, 대량생산에 의한 이윤 축적을 가능케 하는 기술력의 진보를 상징한다.
영화 <아바타>는 자연에 대한 탈신비화가 진행되기 이전의 인류 역사를 '판도라'라는 다른 행성을 통해 재생한다. 판도라의 나비족은 문명화 이전 부족 중심의 생활양식을 재현한다. 그들은 화살을 이용해 사냥을 하고, 수렵 채취 생활을 이어간다. 토테미즘 신앙에 따라 동물을 자연의 일부로 보면서 사냥감이 된 동물에게 '형제'라고 말한다. 또한 '에이와'라는 신성한 나무를 숭배하는 애니미즘,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에너지가 순환한다는 자연관을 지닌다. 이러한 세계관은 모두 원시인의 사고방식으로서 현대인이 문명화 과정에서 상실한 실재 체험을 현시한다. 그들은 탐욕으로 물든 문명의 정반대에서 자연과 상호 호혜의 조화, 동식물과 교감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행복한 과거를 표상한다. 주인공 제이크 설리가 네이티리의 안내에 따라서 부족에 입문하는 과정 역시 문명화 이전의 생활 양식을 복원하고 있다. 그는 활쏘기, 말타기, 이크란 길들이기 등의 주요 과업들을 수행하면서 부족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는다.
이미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평화로운 행성에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 찾아와 평형을 깨뜨린다. 그들은 우주여행, 생명 복제가 가능한 과학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네이팜 탄과 기관총, 전투형 로봇 등의 무기로 무장되어 있다. 그들이 판도라 행성에 찾아온 이유는 단 한 가지 '물질적 이익' 때문이다. 하늘에서 온 사람들은 생명의 나무 아래에 묻혀 있는 언옵타늄에 관심을 갖는다.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에게 언옵타늄은 사용가치가 없는 반면, 하늘에서 온 사람에게는 그것이 지구에서 '돈'이 되기 때문에 교환가치를 갖는다. 지구인은 판도라 행성이 유지하고 있는 조화를 교란하고 파괴하는 부정적 존재로 묘사된다. 개발 기지 책임자는 나비족에게 도로를 깔아주고 의료와 교육 시설을 제공해도 그들은 싫어한다고 언급하는데 지구의 세계사에 등장했던 제국주의자, 식민주의자의 시선을 대변한다. 제국주의는 개발되지 않은 영토를 야만으로 규정하고 그곳에 사는 부족들을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개화시키려 했다. 문명을 전도한다는 명분으로 성서를 든 사제가 찾아온 후에는 총과 칼을 든 탐험가나 군인이 들이닥쳤다. 미개척지를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알맞은 식민지로 개발하여 이윤을 창출하기 위함이다. 근대의 인류사는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개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개발된 영토에 있던 인디언은 제국주의에 의해 침탈당하고 착취당하며 제한 구역으로 내몰렸다. 잉카 문명은 철제 무기를 앞세운 유럽인들에 의해 잔인하게 살육되고 멸망했다. 유럽인들이 지배하는 자리에는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한 플랜테이션이 개발되고 자연은 오로지 이윤 추구를 위한 도구로 사물화된다. 하늘에서 온 사람들도 서양의 제국주의자들과 똑같이 개화 전략이 먹혀들지 않자 폭력을 행사한다. 나비족의 근거지를 불태우고 생명의 나무에 폭탄을 투하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처럼 하늘에서 온 사람과 나비족의 대립은 유럽 제국주의와 식민지 개발의 역사를 되새긴다.
주인공인 제이크 설리는 아바타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초기에 쿼리치 대령의 지시에 따라 나비족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면서 군에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나비족의 생활 양식에 익숙해지고 그들처럼 사고하며 행동하면서 점차 나비족에 동화되어 간다. 자연, 동물과 교감하고 공동체 속에서 나누는 공생의 문화에 동조적으로 변화하는 것에 발맞추어, 나비족의 근거지를 폭력적으로 전소시키는 군대에 반감을 갖고 저항하게 된다. 영화의 관객은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하면서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살육하는 인간들에게 분노한다. 하늘에서 온 사람과 판도라 행성의 부족들이 연합하여 격돌하는 영화 후반의 전쟁 시퀀스는 압권인데, 『총, 균, 쇠』에서 언급되는 청동기 문화와 철기 문화의 대결을 상기시킨다. 판도라 부족은 무기와 화력 면에서 열세에 몰리지만 감독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 장치를 도입하여 최종적으로 탐욕스러운 악인인 하늘에서 온 사람들을 징벌한다. 대지의 여신 격인 '에이와'가 동물들을 동원하여 군대를 몰아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사와는 달리 판도라에서는 과학 문명과 기술에 기반을 둔 제국주의가 판도라를 식민지로 개발하는 데에 실패하고 기존의 원시성과 신성성을 보존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신화적 영웅 서사의 차용
이 영화의 주요 서사는 영웅 신화의 구조를 모방하고 있다. 제이크 설리는 해병 출신으로, 혁혁한 전공과 이력이 있으나 현실에서 다리를 쓰지 못한다. 그렇지만 아바타에 접속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몸을 얻는다. 기묘하게 실현된 탄생이다. 그는 타고난 운동 신경을 보이며, 에이와의 선택을 받는다. 생명의 나무 씨앗이 제이크 설리의 아바타의 몸에 달라 붙는 장면은 그가 신성성을 부여 받았음을 보여주는 징표로 나타난다. 그는 나비족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과업들을 수행하면서 자신에게 닥친 난관을 극복해 나가며, 족장의 딸 네이티리의 마음도 얻는다. 그의 영웅적 면모가 완성되는 것은 '토르크 막토'에 등극하는 때이다. 그는 나비족에게서 추방되었다가 최고의 이크란(익룡)인 토르크를 길들여 그것을 타고 귀환하면서 다시 부족의 신임을 얻는다. 선택 받은 인간의 비범성에 의해서 그는 부족을 연합하는 족장 중의 족장으로 등극한다.
제이크 설리의 서사는 영웅 서사에서 나타나는 신이한 탄생, 탁월한 능력, 위기의 극복, 위대한 과업의 실행이라는 전형적인 구조와 일치한다.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을 믿는 원시 부족인 나비족의 생활 양식과 원시인의 사고 방식과 조응한다. 영화는 신화적 상상력에 나타나는 신성성,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 등 현대 사회가 탈마법화되면서 몰아낸 가치들을 재현한다. 관객은 신화나 전설 같은 옛이야기에 새겨진 정서를 아련한 향수처럼 환기하게 된다.
이는 나약하고 왜소해진 현대인의 육체성에 대한 암묵적 비판으로도 보인다. 대부분 과학자로 구성된 아바타 구성원 중에서 제이크 설리는 해병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갖는데, 그가 가진 탁월한 운동 신경이 머리만 쓰는 과학자들보다 나비족의 생태와 더 큰 친화력을 갖는다. '전사 출신'을 본 적은 없으니 가르쳐보자는 나비족 족장의 결정은 육체를 억압하면서 맹목적으로 기술을 발전시켜온 문명의 정신 비대화 현상과 대비되는 육체성의 옹호다.
영화는 내용 면에서 명백하게 문명 비판의 메시지를 표현한다.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고 정의로운 나비족과 교환 가치를 맹목적으로 쫓는 탐욕스러운 인간의 대립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를 반영한다. 과학자들은 판도라 행성을 연구하면서 나무와 나무가 서로 교감하는 신경 조직을 연구하지만 직접적으로 자연과 소통하는 길을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나비족의 차히크는 에이와와 직접 소통하면서 자연과 대화를 나눈다. 과학은 대상을 분석하면서 살해하지만, 원시인은 자연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면서 자연과 소통하고 일체를 이룬다. 선량한 편에 서는 영웅은 이분법적 사고 방식과 자연스럽게 일치한다.
할리우드 스펙터클의 애도
관객은 <아바타>를 보면서 탄식하게 된다. 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저렇게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문명 위에 건설되었구나. 인디언이 유럽인에게 쫓겨나듯이, 순수하고 타락하지 않은 영혼들을 탐욕스러운 문명인들이 지배하고 함부로 살육했구나. 때 묻지 않은 신화적 세계, 하늘에 떠 있는 총총한 별을 바라보며 길을 가던 과거, 그 행복한 시절로 돌아가면 좋을 텐데. 그런데 간과해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영화가 재현하는 원시 부족의 삶은 오리엔탈리즘의 일종이라는 것. 서양이 동양을 신비화하듯이, 영화는 문명인의 시선으로 원시인 내지는 야만인을 신비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신비화의 기제는 단연 헐리우드식 스펙터클이다.
제이크 설리가 숲에서 맹수에게 쫓기는 시퀀스는 원시림이라는 야생의 위험을 생생하게 보여주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을 박진감 있게 묘사하여 관객을 몰입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제이크 설리가 네이티리를 처음 만났을 때 형광색으로 빛나는 밤 숲의 아름다운 정경, 이크란을 처음 길들여서 하늘을 멋지게 날아다니는 장면들은 시각적으로 화려하여 관객의 넋을 빼앗는다. 거의 환상적으로 묘사되는 원시 부족의 단편들은 영화의 CG 기술의 도움을 받아 더욱 그럴듯한 가상으로 관객들 앞에 재현된다. 이러한 스펙터클은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스펙터클 효과의 예술적 모방이다. 스펙터클 사회 속에서 인간은 왜소해지고 현혹되며 객체화된다. 그것은 자본주의 모순의 본질을 가리는 기만적 매커니즘이다.
<아바타>의 스펙터클과 원시인의 재현은 관객들에게 묘한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상기시킨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원시적 사고방식과 생활 양식에 대한 애도가 진행된다. 우리는 세속적 삶에 매몰되어서 신성성을 상실했고, 자연과 교감하거나 세계와 일체화되는 실재 체험을 잃어버렸다. 그 상실감을 시청각적 스펙터클로 보상받는 것이다. CG를 통해 관객에게 재현되는 가상이 더욱 그럴듯하면 그럴듯할수록 관객은 더욱 깊이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영화를 둘러싼 외적 맥락을 살펴보면 이러한 애도의 진정성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아바타>는 문화산업이 유포한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을 비판하는 이 영화는 문명을 토대로 삼고 있다. 마치 영화 속에서 나비족을 존중하는 양심적인 과학자들이 판도라를 개발하고 착취하려는 기업에 종속되어 있듯, 영화 <아바타>도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유통망 속에 붙들려 있다. <아바타>는 제국주의의 물질적 토대가 되는 자본주의(교환가치에 따른 이윤 추구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사회구성체)를 비판하면서 자본주의의 승리를 알리는 나팔수가 된다.
제국주의 역사를 알레고리하고 비판한 <아바타>는 결코 착취와 억압의 매커니즘을 변혁하지 못한다. 영웅주의라는 오래된 이데올로기와 할리우드식 스펙터클이라는 진부한 형식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탁월한 영상미는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의 심혈을 가늠케 한다. 그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아바타>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예술의 관건은 형식임을 알게 된다. 내용 면에서 메시지가 훌륭하더라도 형식적인 충격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장 체제로 편입되고, 쉽게 소비되는 상품으로 전락한다.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통해 물질문명의 승리를 확고하게 확인하는 모순. <아바타2>가 <아바타>의 서사 구조를 취하되 배경을 바꾸고 영웅주의 대신에 가족주의를 가져옴으로써 동일한 상품이 된 것도 저간의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