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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도서]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최영송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지젝은 2000년대에 한국에서 급부상한 철학자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론과 라캉의 욕망 이론을 접합하여 정신분석적 담론을 사회학으로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젝이 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저서인데, 그가 오늘날까지도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저서들의 토대가 된다. 나는 지젝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최영송이 쓴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라는 해설서를 먼저 읽었다. 해설서는 지젝의 책 구성을 따르는 한편, 지젝의 난해한 논의에서 핵심적인 개념을 추려서 설명하고, 그와 관련된 사례를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이데올로기와 엮었다. 지젝, 라캉, 마르크스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관심이 있고 그들의 핵심 개념인 이데올로기, 대타자, 대상a 등에 대한 기초적인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도움이 되는 책이다.

 

누군가의 사상을 한마디로 섣부르게 정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기억의 편의를 위해서 감행해보자면, 지젝이 독자에게 내리는 강령은 다음과 같다.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창출하기 위하여 행동하라!' 이 명제는 책 한 권 분량의 설명을 요구한다.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발생하며,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왜 창출해야 하는지, 그리고 창출에 수반되는 수행이 어째서 이해가 아니라 행동인지를 해명해야 한다.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헤겔의 변증법을 부정의 변증법으로 뒤집고, 마르크스가 분석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주체의 마음에서 재생산되는지를 라캉의 논의로 규명하고자 했다. 주체가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는 과정을 추적하다보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거리를 얻을 수 있으며, 비판을 넘어서 이데올로기를 변화시키는 가능성까지도 견인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후기구조주의 담론에서 이미 죽음을 선고한 주체를 다시 부활시키려는 시도로서, 그는 헤겔과 라캉을 주요 참조점으로 삼았다.

 

어떻게 주체는 만들어지는가? 라캉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상징적 질서에 편입되며, 균열을 경험한다. 인간이 자신의 자아상을 전체로 인식하는 시기를 거울 단계라고 한다. 자기를 전체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아야 한다. 거울 단계 이전 시기(생후 6개월 이전)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전체적인 상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에게 자기는 손, 발, 다리와 같은 신체 일부로만 인식된다. 주체는 자신에 대한 전체적인 상을 얻기 위해서 거울이라는 매개를 거쳐서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애초에 진정한 자신을 직시할 수 없는 분열된 존재이다. 거울은 되비쳐주는 타자이다. 거울에 비춰진 자기 인식만이 가능하므로, 인간 존재는 상징적 질서가 비춰주는 굴절된 빛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며 구조화된다. 사회화 과정은 상징적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인간은 언어를 습득하면서 언어적 상징에 따라서 세상과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언어가 사회적 산물이기에 언어를 구사하는 인간은 이미 빗금친 주체로서 진정한 자기를 볼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상징적 질서가 교차하는 지점을 '누빔점'이라고 하며, 이 누빔점의 자리에 '주인 기표'(대타자)가 자리한다. 인간은 주인 기표에 비추어서 자신을 정립하므로, 누빔점은 일종의 '거울'인 셈이다. 예를 들어, '돈'은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기호로서 작용하며, 돈에 의해서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성장하고, '돈'의 중요한 가치를 알게 된다. 그리하여 부유한 사람은 주인 기표로 등극할 수 있다. '자본가', '건물주'는 오늘날 대표적인 주인 기표이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본가와 건물주의 내면이나 인품보다는 사회적 관계에서 맺어지는 수행과 작용의 매커니즘이 중요하다. 그 속에서 성장 세대인 아이들이나 청소년은 '자본주의'의 각종 이데올로기를 체득하게 된다. 이데올로기는 상징계의 기표 연쇄와 욕망을 진주 꿰는 실처럼 연결한다. '-주의'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요약하는 이데올로기 명명법이다. 공산주의자는 역사를 계급 투쟁의 장으로 보며 실용주의자는 대상의 가치를 쓸모에서 찾는다.

 

대타자를 통해서 자기를 보는 주체는 이미 분열되어 있다. 다시 말해 상징적 질서에 편입되면서 자연적 본성을 충족시키지 못해 외상을 입는다. 주체는 외상을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으므로 무의식적 차원에서 자기를 억압한다. 그것은 상징적 질서에 편입되는 대가이다. 억압은 증상을 낳는다. 증상은 완전하고 통합되어 있다고 가정되어 있는 주체의 균열, 불균형을 드러낸다.

 

지젝은 증상을 사회적으로 확장하여 이해한 이가 마르크스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의 미덕으로 포장된 자본주의 사회의 증상이 프롤레타리아라고 진단했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유와 평등을 구가한 것처럼 보이는 사회의 불균형, 결여, 균열이다. 그들이 제공한 노동력을 착취하여 얻은 잉여가치에 의해서 자본주의는 동력을 얻는다. 자본주의는 신체의 자유, 거래의 자유를 허락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자유는 부르주아에게 유리한 자유일 뿐이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불공정한 거래와 착취 관계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가 이에 저항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공모하는 까닭을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에서 찾았다. 주류 계급의 이데올로기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사회적인 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인식이지만 그것이 마치 자연적으로 이미 주어진 진리인양 유포되기 때문에 기만적이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는 계급적 갈등을 속임수로 봉합한다.

 

분열된 주체가 생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앓고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기 때문이다. 주체가 겪는 증상을 봉합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이다. 지젝에 이르러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론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다시 해석된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더라도 모른 척하고 싶어한다.'

 

알튀세르의 주체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모든 주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된다. 학교는 대표적인 이데올로기 국가기구다. 주체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국가가 원하는 존재로 구조화된다. 권력에 순응하고, 사회 규범을 준수하고, 사회에서 필요한 역량과 기술을 갖춘 인간이 되도록 길들인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다양한 가치들도 국가가 선별한 것들이다. 다문화 교육, 금연 교육, 환경 교육, 독도 교육, 경제 교육, 진로 교육 등등의 교육 내용은 주체를 호명하는 도정에 있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호명 주체로부터 '우발성'이라는 아이디어로 나아가면서 해방의 가능성을 점쳤지만, 지젝은 호명 주체를 비판하고 상징적 질서 너머의 '실재계'로 나아간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은 상징적 질서에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을 욕망하는 주체다. 분열되어 '소외'되고 균열된 자기를 볼 뿐만 아니라 대타자 역시 균열되어 있음을 깨닫고 새로운 향락(주이상스)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자본가'와 '건물주'라는 주인 기표 대신에 다른 기표가 욕망과 맞물려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 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오는 표주박 공예가, 모형 기차 만들기 전문가, 실뜨기 달인 등이 그 예이다. 그들은 상징적 질서에서 얻은 자신의 상처로 인해 대타자에 꿰어 있는 시니피앙 대신에 다른 시니피앙과 자신의 욕망을 결속시켰다. '케 보이(Que voi)?'(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새로운 욕망의 대상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상징계 질서의 균열로부터 나타나는 '실재'의 영역이며, 그 욕망의 대상을 '대상a'라고 한다. 표주박 공예가나 실뜨기 달인들은 자신의 작품을 수없이 끝없이 만들어내는데, 그 지속의 힘도 '대상a'를 향한 열망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고 대상a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a는 텅 비어 있다. 주인 기표가 본성상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효과에 의해 일반적 대상에서 선택되듯, 실재계의 대상 a 역시 주이상스와 시니피앙의 결합에 의해서 수행되는 효과이다. 이 때 증상은 증환이 된다. 이것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고통, 그 고통을 불사하고서라도 이루고자 하는 운동이다. 대상a는 지각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숭고하다. 인식의 범위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지젝은 상징계 질서의 균열 너머로 향하는 인간의 욕망에 주목한다. 이 지점에서 숭고한 대상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재평가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지배 권력을 정당화하는 편견이며 고정관념으로서 타파해야 할 대상에 해당한다. 조선 시대의 충과 효의 이데올로기가 대표적이다. 충과 효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지탱하는 중요한 관념이었다. 그것은 다양한 귀감과 역사적 전거에 의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었다. 효자와 충신은 숭고한 아우라로 백성의 삶을 강제했다. 충효 이데올로기는 양반을 비롯한 권력층의 지배를 정당화했고 피지배층을 억압했음에도 피지배층은 그것을 억압이라고 느끼지 않고 자연적인 것으로 수용했다.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교체될 수 있다. 오늘날을 지배하는 것은 효용성 이데올로기이며, 자본주의 사회를 정당화한다. 상대적으로 충과 효는 전근대적이고 낡아버린 관념으로 인식되고 현대인의 인식체계에서 퇴색되었다. 그렇지만, 사회의 변화에 따른 이데올로기의 교체는 실재계를 향하는 향락의 운동이 아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지젝은 주문한다. 지금의 사회를 공고하게 만들어가는 상징적 질서 너머의 실재를 욕망하라고. 그것은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 '물 자체'이지만, 숭고한 대상으로서 새로운 질서를 창안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것 역시 욕망이 만들어내는 환상이지만, 현 체제에 함몰되지 않는 주체는 상징적 질서와 다른 환상을 품을 때 실현된다. 우리는 그러한 주체를 해방된 주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욕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며,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항 담론으로 수행적 효과를 창출해야 한다. 그럴 때 공고해 보이는 현 사회의 체제에 균열이 발생하고 새로운 사회를 향한 연대와 사회적 운동이 가능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만나는 중학생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상징적 질서 너머의 실재를 추구한다. 어른들은 관습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사춘기'라고 일컫고 있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자유로운 주체가 되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고 있다. 사춘기에 보이는 반항은 오이디푸스 단계로서 대체로 기성 세대로 편입해 가는 도정으로 인식된다. 대부분 그들의 반항은 결국 상징적 질서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극도로 반항적이었던 학생이 고등학교 들어가서 철드는 경우가 많은데, 오이디푸스 과정을 격렬하고 빠르게 거쳤다고 보아야 한다. 사춘기는 주이상스와 얽히는 기표를 탐색하는 과정이다. 대타자가 균열되어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새로운 대상을 욕망하는 시기인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주이상스를 추구하는 학생들 대부분이 담배와 술과 같은 기존의 상징적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일탈 행동을 보이는 소위 '문제아'는 그들의 일탈로 자유를 구가한다고 생각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상징적 질서의 권력을 가진 기표를 소유하고 싶을 뿐이다. 그들은 명품이나 외제차로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는 어른들의 욕망을 욕망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상징계 질서의 재생산에 불과하다. 진정한 사춘기는 상징계 질서 너머에 대한 상상이다. 어른들이 짜 놓은 판을 부정하고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기표들의 연쇄를 꿰어서 새로운 질서를 창안하는 시기이다. 거기에서 동뜨게 성취를 보인 인간들이 위인이 되고 달인이 된다. 이를 테면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욕망과 다른 것을 일관되고 열정적으로 추구했음에 틀림 없다. 그의 '대상 a'는 피아노에 대한 열정이지만, 그것은 실체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숭고한 대상은 끊임 없이 그를 추동하는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상징계에서 인간을 기만하지만, 실재계에서 인간을 해방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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