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플랭클은 정신의학과 의사였는데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세계2차대전에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서 살아남는다. 그때 겪은 수용생활을 담담하게 회상하면서 쓴 책이 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서술한다는 점에서 아니 에르노의 화법과 정말 비슷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와닿는 내용도 많았고.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는 공간, 30명이 들어갈 공간에 100여명이 들어가 생활을 하고, 매일 빵 1개로 목숨을 연명하고, 매일같이 추위와 싸우면서 맨발로 흙을 파고 일을 해야했던 수용소 삶에서 인간으로 존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경험을 회상하면서, 가혹한 환경에서 인간이 내면의 자유를 유지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답을 내려본다.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 동물이라고 한다. 내 주변이 풍요로울 때는 마음도 여유롭지만, 내가 척박한 환경에 놓여 있을 때는 상대적으로 마음이 여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잠도 잘 수 없고,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생활을 몇년이나 지속하는 환경 속에서 인간에게 정신적 자유란 존재할까? 환경에 의해서 내 정신도 조종되지 않을까.
그런데 빅터 프랭클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기 행동과 정신에 자신 스스로가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드물지만 자신의 빵을 나눠주거나,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스스로의 내면을 지켜나간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육체가 아무리 힘들어도 내 내면의 영혼만은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 존재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나는 수용소에서 이 말을 자주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시련과 죽음은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은 빼앗기지 않은 영혼의 자유이다
빅터 프랭클이 말하는 공'空'과 선'?'
인간이 시련을 겪는 이유와 시련을 극복하는 방법
빅터 프랭클이 놓였던 상황은 불완전함의 극치였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도 살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언제까지 이런 삶이 지속되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기에 약속되지 않은 미래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그럼에도 내면의 선이라고 해야할까, 양심이라고 해야할까, 이 개념은 "?"보다는 "善"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세상이 불완전함에도 누군가가 만들어 놓는 이미지, 이런 잔혹한 세상에서는 누군가를 밟아야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전쟁 논리, 그런 이미지에 속지 않고 내 진정한 모습, 내 자아를 간직하려고 노력한다는 면에서 공'空'과 선'?'의 개념과 같다고 생각했다.
빅터 프랭클은 이런 상황에서 제 정신을 유지했던 사람들은 모두 내 내면의 모습에 집중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주변 환경이든, 타인의 말이든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기력이 쇠해지고 인간으로 점점 멀어져 가지만, 아주 작게 남은 최소한의 의지로 최소한의 인간다움, 내 안에 남아있던 나의 모습을 유지하려고 했다고 적는다. 불완전함 속에서 조금이나마 나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고통에 대한 이야기, 우리가 겪었던 이 세상의 불완전함과 시련을 무엇이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 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수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실제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렇게 지고한 도덕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수감자 중에 서 아주 적은 사람만이 충만한 내면의 자유를 지키고, 시련을 견딤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얻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과제들, 즉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상황은 그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단 하나만 있는 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 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 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그래서 내가 정리한 것은, 이 세상은 불완전해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시련이 찾아오지만 그럼에도 이 시련은 분명 유리에게 의미가 있다. 이것을 과제로 받아들이기는 무척 힘이 들지만 그럼에도 고통을 짊어지고 나만의 방식으로 이겨내보겠다고 다짐한다면 진정한 내 자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이 책이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불완전함의 완전함, 현실과 이상, 공'空'과 선'?"의 개념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 존재가 유일무이한 한,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자신의 숙명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존재란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을 찾아 계속 걸어가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