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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끝나지 않는 어머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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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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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보다 더 무서운 힘으로 제 몸을 바꾸는 생명체들이 있다. 이정록의 「제비꽃 여인숙」은 그 작고 여린 존재들의 깊은 생명력을 일상적이지만 힘 있는 언어로 잘 표현해내고 있다. 작가의 시선은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로부터 출발, 아이를 낳고 돌보는 이 땅 어머니들의 모성에로 향한다. 시인은 생명 현상이 세상에 던지는 미묘한 울림을 내밀하게 응시하는 작업으로 시집을 시작하고 있다. 특히 (시집 제목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제비꽃 아래”라는 시편이 작지만 경이로운 생명의 신비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아니, 뿌리 사이에 굼벵이 한 마리 모로 누워 있다) 아기 부처님처럼 주무시고 있다 (…) 요구르트 병 허리를 매만지다가, 안에 고여 있는 젖 몇 방울을 본다) (…) 울음보만 바라보며 몇 년을 기다려온 굼벵이) 그 아름다운 허리를 오래 내려다본다) 할 말 아끼다가 멍이 든 제비꽃에게도 합장을 한다) 문득 내 손가락의 실 반지 그 해묵은 뿌리에 땀이 찬다) 제비꽃 아래의 고운 숨결에 동침하고 싶어) 내 마음 감나무 새순처럼 윤이 난다. - <제비꽃 아래> 中
꽃을 심으러 나갔던 시인이 제비꽃 아래 누워 있는 굼벵이 한 마리를 보면서 시는 시작된다. 요구르트 병은 “젖 몇 방울”을 올려 굼벵이를 먹이고 있고 제비꽃은 마치 “여인숙”처럼 굼벵이를 품는다. 차돌도 뿌리도 굼벵이의 잠을 방해할까, 살짝 그를 피해간다. 그리하여 그가 노래하는 세계는 생명이 생명을 보듬고 키우는 세계, 굼벵이가 매미가 되기까지 “사랑은 여러해살이”인 세계가 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시인의 이러한 시각은 여타 생명시와 구분될 수 있다. 단순히 예찬적이고 추상적인 생명시들은 그 뿌리에 힘이 없어 우리의 관심을 환기하지 못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관념이 아닌 일상으로부터 출발하는 그의 시선은, 대지와 대지에 발 붙인 사물들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생명 현상에 대한 즐거운 관심을 유발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그것이 “나무로 다가가는 바람과 햇살과 빗물의 종교, 푸른 잎으로 외는 주문” 이며 “밤하늘 별자리를 통째로 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생명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것을 돌보는 힘, 모성에의 관찰로 자연스럽게 옮겨 간다. 대지의 생산성이 여성의 육체, 모성성과 연관지어지는 것은 오랜 비유이다. 생산과 돌봄의 이미지, 아니 행위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처지고 터진 살이라 해도 “숨소리 싱싱한 저 방앗간”으로부터 인간이 태어나고 자란 것이다. 그 방앗간은 “밀물 썰물 몽땅 품을 수 있는 오지랖”이며 “낙숫물을 받들고 있는” 돌이다. 흔히 말하는 모성이며, “껍질을 억만 번 벗어도 수컷은 알지 못”하는 세계이다. 그리하여 종일 시간과 말을 낭비하고 있는 “저 수컷을 매우 치라”고 소리치며, “궁둥이를 중심으로 온몸이 뭉쳐져 있”는 어머니들의 자리를 쓰다듬고자 하는 것이다. 모성에 대한 그의 발언은 단순 예찬적이지 않기에 위험하지 않다. 사실 모성 예찬적 발언은 여성들을 가두는 올가미로 작용하기 쉽다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어머니가 가진 여성적 생명력을 탐구한다는 것은 자신이 본래 태어난 곳을 찾는다는 의미인 동시에, 이 땅에 무수히 잠재한 모성을 이끌어냄으로써 영원히 사는 세계를 발견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움이자 영원에 대한 갈구인 것이다. 모성을 통해서야 비로소 자연의 신비와 하나될 수 있으며 작은 존재들을 돌볼 수 있기 때문이다.
봄이면 싹이 돋고 가을 되면 낙엽 지는 자연의 신비는 단순히 표면적인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대지의 고른 흙이, 곤충의 도움이, 바람의 흐름이, 물의 소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정록의 시는 단순히 자연 예찬적인 관념을 넘어서 더욱 근원적인 생명, 모성으로 깊이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가 말하는 모성이 단순히 인간의 어머니가 아닌, 세계의 어머니로 승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그러하다. 영원의 어머니이다. 생명, 끝나지 않는 어머니의 노래. 사족을 달자면, 모성에 대한 그의 인식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느껴진다. 자신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주고 있다는 느낌. 그러나 어쩌랴, 제 몸으로 아이를 낳는 여자와 그것을 지켜보는 남자의 감성이 일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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