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적으로 오밀조밀 잘 쓰여진 듯 그럴싸 해보이나, 읽고나니 알맹이가 없다.
즉, 스타일리쉬(?)하게 글은 쓰여졌지만, '도대체 이 책을 읽고 내가 뭘 느껴야하나'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8편의 수록된 단편들 중에서 두 편 정도만 그냥 저냥 읽어줄만한데, 그 마저도 어지간히 글 좀 쓴다는 작가들이 한 두번씩은 쓰게 되는 성장형, 가족형 이야기라서 새롭거나 신기할 것도 없다.
이 책이 별로인 조짐은 첫 단편 '시간의 궤적'부터이다.
얼추보면 프랑스 유학중이던 '나'와, 그 즈음에 알고 지내던 주재원 '언니' 에 대한 이야기로 작가의 의도는 뻔히 보이지만...일단 화자인 '나'가 조금 문제다. 그냥 별생각 없이 유학 갔다가, 공부는 안하고 일주일 내내 한국 교회만 줄창 다니면서 외로움을 달래다가, 체류증 연장을 위하여 현지인과 사귀다가 (다행히)결혼까지 갔지만, 언어와 문화적 차이 때문에 (종종 경제적으로 까지) 외롭거나 괴로워하며 사는...그냥 실패 유학생 뒷 이야기. 특히 프랑스면 더욱더... 그러다보니, 작중 화자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고...'내가 저런 대책없이 사는 허접한 애의 이야기까지 들어야하나'하는 자괴감이 든다.
'여름의 빌라' 역시 뭔가 담은듯하나...주아와 지호는 시간강사이긴하지만, 유학파 박사라는 나름 먹고살만한 애들인데, 태국의 수상가옥을 보는 지호의 시선이 조금 당황스럽다. 뜬금없기도 하거니와...과연 그런말들이 그 입에서 나올 수 있을까,하는 면에서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생각도 든다.
'고요한 사건'은 일전에 다른 리뷰에서도 썼지만, 이 분야의 여왕은 '외딴방'의 신경숙이다. 심지어 김혜진 작가도 얼마전에 비슷한 내용의 책(아마도 '불과 나의 자서전'인가 하는 작품을 썼다. 그래서 잘 읽히는 소재를 선택했지만, 아무래도, 글빨이든 말빨이든 돋보이는 부분이 없다.
'폭설'은 뒷 마무리가 이상하고,
'아직 집에 가지 않을래요'는 착한 의사 남편을 둔, 순종적인 와이프의 불안함, 불균형 같은 것이 조금 웃긴다. 82년생 김지영도 나오고 했는데...그렇지 않을 바에야 그냥 집에 차려 입고 앉아서 백화점 쇼핑이나 다니면 될 것 같은데...뭐가 불만이람.
'흑설탕 갠디'는 깔끔하기는 하나 그냥 소품정도의 역활만 할 뿐이고...
'아주 잠깐 동안에'는 뭔가 흉내는 내고 싶은데 소재도 엉성하고, 임팩트도 없고, 남는 것도 없다.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역시 '고요한 사건'의 카피같은 느낌인데, 그냥 어딘가에서 수없이 봐왔던 이야기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 같다.
전반적으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쩡하고, 가족을 포함한 타인은 이러이러 하였지만, '나'는 무사히 잘(?) 살고 있다,는...이게 도대체 뭐하자는 글인지 살짝 의구심이 생긴다.
혹시, 잘못 읽었나 싶어, 작품해설을 보니 칭찬 일색이고,
작가의 말도 그냥 공허하다. 영감을 받은 영화,음악,미술, 다른 문학작품에 대해서 풋노트를 달아놓았는데, 이는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고 연구하여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그냥 남의 인스타그램가서 타인의 삶을 훓어보고는마구 마구 상상해서 쓴 것 같다. 뭔가 리얼리티가 떨어진다는 말이다.
백수린 작가의 글이 요즘 트렌드라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나름 외국 생활을 하였고 그로 인한 배경의 신선함을 좋으나, 실상 열어보면 글에 '삶의 그 무엇'이 없다. 그냥 별거아닌 감정의 장난질에 썩 적극적으로 대처도 하지 못하는듯하며...그냥 카드들고 백화점에나 가서 신상 핸드백이나 사던지, 아니면 스타벅스에서 커피나 한 잔 마시고 수다나 떨면 끝날 정도의 이도 저도 아닌 심심함이 글 전반에서 느껴진다. 뭐 '죽고 싶을 정도는 아니지만, 샤넬 핸드백 하나들고, 커피는 꼭 스타벅스에가서 마실꺼야' 정도의 깊이.
이 책을 책장에 꽂아 넣으면서, 내 책장에 꽂혀있는 다른 책들을 살펴보았다.
책들은 겉표지만 봐도, 그 삶의 생생함이 전해져 칼같은 글들이 떠오르고, 그게 무엇이 되었든 송곳처럼 내마음을 후벼파 숨이 막힐 지경인데...이 작가의 작품은 그냥 겉표지가 예쁜 잡지 같다. 내 책장에서 언제까지 생존할 수 있으려나.
인간과 삶에 대한 이야기는 영원하겠지만, 스타일만 강조한 이야기는 생명이 짧다. 스타일은 쉽게 변하니까... 기대를 많이 했던 소설집인데, 정말 많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