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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아마도

[도서] 언젠가, 아마도

김연수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소설가 김연수의 글을 여행잡지 <론리플래닛>에서 본 적이 있다. 병원에서 진료 차례를 기다리며 집어든 잡지였다. 이 책에도 실린 '그 많은 비누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나도 호텔에 비치된 새 비누의 종이 껍질을 벗기면서 쓰다 만 비누는 어떻게 되는지 잠깐 궁금해 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궁금증은 다음 순간 증발해 버리곤 했다. 하지만 작가는 쓰다만 비누의 행선지를 기어코 찾았던 것 같다. 내전을 피해 우간다에서 미국으로 이민온 '데릭 캐용고'라는 아이가 버려지는 호텔의 쓰다만 비누를 모아 재활용 비누를 만든 뒤 제 3세계 아이들에게 나눠준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참 다행이다~ 그러면서 푸근한 마음으로 잠깐 동안 멍하니 호텔의 쓰다만 작은 비누들이 하늘로 날아올라 편대를 이루어 아프리카로 날아가는 상상을 했던 것 같다.

 

그 때는 몰랐지만 이 책을 보니 그 글은 연재 초반에 실렸던 글 같다. 작가는 4년 반 동안 그가 했던 여행의 편린들을 <론리플래닛>에 연재했고, 그 글들을 다듬어 이 책을 펴냈다. 내 책장에 고이 꽂혀있는 <여행할 권리>가 2008년에 나왔으니 이번 책은 그가 10년 만에 낸 여행에세이인 셈이다.

 

나는 김연수의 소설을 무척 좋아하여 장편의 경우 거의 다 읽은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에세이도 여러 권 읽었고 좋아한다. 그의 소설과 에세이는 맛이 다르다. 그는 에세이에 특별히 유머라는 깨소금을 한 번 더 톡톡 뿌려넣는 것 같다. 힘을 풀고, 손목의 스냅만을 이용하여 톡톡!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그렇다.

 

레소토에서 맥주를 마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일단 마을을 찾는다. 자칫하면 해 떨어지기 전에 못 찾을 수도 있다.

2-깃발이 펄럭이는 집을 찾아서 그 색깔을 확인한다. 흰 깃발은 수수 발효 맥주를, 노란 깃발은 옥수수 발효 맥주를, 빨간 깃발은 육류를, 초록 깃발은 채소를 판다는 뜻이다. 입맛에 따라서 흰 깃발과 빨간 깃발 중 선택한다.

3-안으로 들어가서 맥주를 마시려고 나란히 앉아 있는 이들 틈을 파고들어 사람들이 입을 대고 한 모금씩 마신 대접이 내 앞에 올 때까지 기다린다.

4-용기를 낸다.

5-아직도 못 마셨다면, 한 번 더 용기를 낸다.

6-다음 사람이 기다리니 빨리 용기를 낸다.  (p22)

 

맥주는 엄청나게 마시고 싶지만 앞에 놓인 맥주 대접은 이미 여러 사람의 입을 거친 것. 게다가 주위에는 이방인이 과연 맥주대접에 입을 댈까 궁금해하는 수십 개의 눈이 반짝반짝 하는 상황이라면....그 상황이 사진처럼 머릿속에 떠올라 나혼자 큭큭 웃었다.

 

유머만 있는 건 아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는 소설가로 등단하기 전 시인으로서 먼저 등단한 섬세한 감성의 작가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그가 여행지에서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따라 읽고 느끼면서 나도 때로 울적하게 외로워졌고, 문득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그리워졌으며, 자주 행복했다. 나는 책을 읽으며 거의 모든 글의 마지막 문장과 중간 중간 많은 문장에 줄을 긋고 말았다. 그리고 그중 몇 문장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그러면서 나는 '여행'이라는 것을 새로 발견했다고 느꼈다.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 도처에 널려 있는데도 간절히 원하지 않는 인생이란 어쩐지 낭비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p27)

 

왜냐하면 여행에서 두 번 다시란 없으니까. 다시 왔을 때 나는 그 때의 그 사람이 아닐 테니까.(p31)

 

멀리서 바라볼 때 라스베이거스가 신기루처럼 우리를 유혹하는 까닭은, 결국 대개는 패배할 운명이라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소망하고 다시 꿈꾸는 일이 바로 인간의 일이기 때문이리라.(p48)

 

"이 인생은 모두 너의 것이고, 그게 외로움이라도 마찬가지야. 네 것인 한에는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야. 우리라면 그걸 즐길 거야."(p57)

 

자유는 남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한다. 더 많은 사람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나는 더욱 더 자유로워진다. 그런 점에서 나는 모든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래서 세상세는 이토록 많은 책이 있는 게 아닐까?(p75)

 

세상이란 어디까지 나빠질 수 있을까? 하지만 그건 별로 궁금하지 않다. 내가 궁금한 건 인간이란 어디까지 긍정적일 수 있느냐는 점이다. 그건 아마도 지옥도 정겨워질 때까지가 아닐까.(p115)

 

서울은 마치 내가 그토록 읽고 싶어 하던 소설책과 같았다. 표지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 멋진 책을 앞에 놓고서 누가 발췌독을 하리오?(누가 버스를 타고 다니리오?) 누가 요약된 줄거리와 서평에 만족하리오?(누가 패키지 투어에 참가하리오?) 오랫동안 기다린 책이라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통독해야 마땅하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끝까지 걸으면서 구경해야만 한다. (p192)

 

그리고 내가 떠나온 곳과 다름없이 그 나뭇잎으로 하오의 햇살이 비춘다. 바로 그 순간이 '여기는 어디이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때다.  대개 여행의 목적은 그런 의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데 있으니까, 비로소 나는 목적지에 다다른 셈이다.(p193)

 

이제야 알 것도 같다. 여행지에서 나는 외로웠다는 걸, 그래서 타인들에게 잔인했다는 걸. 그런 점에서 모든 여행자는 자연주의자인 셈이다.(p214)

 

열심히 사진을 찍고 돌아온 어느 여행의 경우, 사진으로 남은 기억은 면도날처럼 날카롭다. 하지만 어무 날카로웠던 걸까. 우연히 만난 사람과의 대화나 어디선가 풍기던 이국적인 냄새 혹은 여행지의 전반적 느낌 같은 건 송두리째 기억에서 잘려나간다.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사진 속 풍경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그 뒤로 나는 사진을 잘 찍지 않는 사람이 됐다.(p235)

 

이동 시간이 이처럼 획기적으로 줄어든다면, 우리는 여행의 목적을 더 잘 알게 되리라. 여행의 목적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는 데 있다는 걸. 그러므로 여행자란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다.(p255)

 

어떻게 하면 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떠나 나를 둘러싼 풍경을 바꾸면 된다. 그게 여의치 않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본다. 새롭고, 또 신기하게.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때 나도 바뀐다. 그러므로 여행이 다 끝났을 때, 비로소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p256)

 

 

그가 가 본 스페인의 알람브라 궁전이나 포르투갈의 리스본(그곳에서 달리는 28번 트램), 드라켄즈버그산맥, 레소토, 라스베이거스, 모하비 사막, 독일의 밤베르크, 베트남 하노이, 터키의 카파도키아, 중국 옌지, 러시아 상테르부르크나 블라디보스토크, 노르웨이 올레순 같은 곳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의 글을 읽으면서 아주 조금은 그와 함께 여행한 느낌이 들었다면 허풍이 심한 걸까. 가 본 적도 없는 그곳들이 그립다고 하면 나는 무지 뻥쟁이 인 걸까.....

 

개인적으로 이책에서 좋았던 점은, 곳곳에 문학에 대한 그의 생각, '소설가의 일'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생각은 주로 연필에 대한 그의 사랑 또는 집착에 관련되어 나타나곤한다. 

 

모든 것을 살 수 없다면, 그럼 무엇을 살 것인가? 그건 마치 인생의 질문처럼 느껴졌다. 모든 삶을 살 수 없다면, 그럼 어떤 삶을 살 것인가? 그래서 나는 연필을 사기로 했다. 연필은 내게 가장 겸손하면서도 가장 큰 변화를 이끄는 도구이기 때문이다.(p67)

 

어둠 속에서 카프카가 쓴 글은 불꽃과도 같았다. 연필은 그런 불꽃을 피우는 부싯돌 같은 것이다....꺼지지 않는 불꽃. 모든 국가가 멸망하고 인류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 불꽃은 계속 타오를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런 불꽃을 피울 수 있는지 소설가로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글쓰기의 원천기술이랄 수 있으니까.(p170~171)

 

사실 나는 낯선 장소에 있는 걸 그다지 즐기는 성격이 아니다. 사실은 싫어하는 쪽에 가깝다. 그럼에도 여행할 기회가 남들보다 많았다. 오로지 소설가가 됐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는 한, 나는 낯선 곳에 있는 걸 직업적으로 즐겨야만 한다. 소설관에서 비롯된 지론이다. 소설에는 욕망을 지닌 주인공이 등장한다. 욕망하는 목표가 생기는 순간부터 그는 헤매게 돼 있다. 이 '헤맨다'는 말을 그럴듯하게 표현하면 여행이 된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는 일상의 시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시공간을 찾아가는 여행담이라고 할 수 있다.(p173~174)

 

이 책을 다 읽으면 독자들은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는 하고 싶어질 것 같다.

1. 여행을 하거나

2. 술을 마시거나

3. 소설을 쓰거나.

나는 위의 셋 모두를 하고 싶어졌다.

 

책을 덮다가 우연히 책날개에 적힌 그의 프로필을 읽게되었다. 그리고 그 맨 끝에서 너무나 반가운 한 줄을 읽었다.

'지금은 새 소설을 쓰고 있다.'

아무렴. 그러셔야지요. 많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협재 바다가 보이는 문구점, 筆詩도

언젠가 꼭 여세요. 시집과 연필 공책을 묶음으로 파는 가게.

아마도 제가 찾아가 허접한 자작시나마 내밀게 될 것 같습니다만....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review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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