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스케일링을 하려고 치과를 찾았다.
치료 의자에 누워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데, 한쪽 벽의 벽지가 찢어져서 시멘트가 드러나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치과 운영이 요즘 예전만 못하다는데...그래서 그런가?"
언제나 친절히 대해주시는 의사 선생님을 떠올리고는 마음이 짠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이 그야말로 '숙자건희(p29)'라는 것을 깨달았다. 불쌍한 것은 치과의사가 아니었다. 환자인 우리였다.
이 책은 서울대 치의대를 나와 현재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의사가 쓴 소설이다. 그가 10년 전 개원을 하면서 임플란트 치료비가 필요 이상으로 높다고 생각해서 낮추자 다른 병원과 치과협회로부터 조직적으로 큰 괴롭힘을 당한 실화를 바탕으로 썼다.
이런...치과에 이렇게 무시무시한 비밀이 숨어 있을 줄이야.
대학에 다닐 때는 학점을 담합하고, 개원을 하고서는 치료수가를 담합하고. 담합을 따르지 않고 치료비를 낮추어 물을 흐리는 치과를 조직적으로 괴롭히고.....치과를 찾아 치료비를 문제 삼는 등 자신을 괴롭히는 '개, 돼지'같은 환자들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익명게시판을 통해 유통하고.....
아...내가 아는 치과 의사선생님들은 다들 친절하고 양심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진정 그들의 뒷모습은 이렇단 말인가?
이 이야기가 정녕, 저자가 직접 겪은 일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란 말인가?
물론, 모든 치과의사들이 '비양심적'이진 않을 것이다. 그들 중에서도 치료에 성심을 다하고, 과잉 진료를 하지 않고, 지역을 위해 봉사하며 보람을 찾는 좋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는 많은 치과의사들이 대학 시절부터 워낙 작은 집단에서 폐쇄적인 생활을 하면서 동질화 되고, 그 때문에 문제의식이나 비판의식을 갖지 못하고 사고가 마비된 채 일하고 있다고 폭로한다.
그들은 남들이 놀 때(?) 자신들은 고생하면서 공부했으니 부유하게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비뚤어진 특권 의식을 갖고 있다. 때문에 환자들에게 덤터기를 씌워서라도(그들은 절대 덤터기라고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목표하는 수익을 얻어야 하고(저자는 보통 치과의 순수익률이 40%는 될 거라고 말한다. 40%?!!!!!) 만약 몇몇 의사들이 이런 현실에 의문을 품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조금 다른 경영을 해 보려고 하면, 자신들의 손쉬운 수익구조를 위협하는 '공적'으로 몰아 조직적으로 괴롭힌다. 아예 망하게 만들어 다른 의사들이 그런 생각을 못하게 하는 본보기를 만든다.
나는 치료수가를 '적정하게' 하려는 저자와 그를 막으려는 다른 의사와 치과 협회의 싸움이 너무나 기가막히고 흥미진진해서 손에 땀을 쥐고 정신없이 읽다가 이것이 마냥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흠칫 떨었다. 특히 치과의사들이 익명게시판에 올렸다는 환자 블랙리스트 내용을 읽으면서는 정말 눈에서 불똥이 튀는 줄 알았다. 배운사람들의 저질스러움에 흥분해서 손이 막 덜덜 떨렸다.
올해 읽은 어떠한 스릴러보다도 끔찍하고 무서운 이야기다. 동시에 치과의사들만의 문제인가를 생각해보았다. 그들만큼 폐쇄적이고 특권의식을 갖고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철저히 뭉치는 집단이 또 있지는 않은가? 혹시 내가 거기 조금이라도 일조하고 있지는 않은가? 묵인하고 있지는 않은가?
책을 다 읽고 내지 제목 아래에 적힌
'이 소설의 내용은 다 허구다. 만약 실제와 비슷하다면 그것은 현실이 너무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이라는 문구를 다시 읽었다.
아...슬프기까지 하다.
저자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기사를 찾아보니 채널 예스24 인터뷰 기사가 가장 자세하고 좋았다. 예스24블로그는 이상하게 링크가 잘 안된다.(보안 문제로 어쩌고...하는 메시지가 뜨기 일쑤다.) 때문에 링크는 안하겠다. 하지만 반드시 한 번 읽어보시길. 이 책을 안 읽어도 그 인터뷰만은 꼭 읽어보시길 권한다.
p18
"그런데 원장님은 왜 임플란트 가격을 낮추셨어요?"
...
"그냥 환자분들한테 가격 얘기하는 게 너무 불편했어요."
"네? 왜요?"
"'임플란트 하나에 300만 원입니다.'이렇게 입이 잘 안 떨어졌어요."
p28
"예전보다는 못하다는 소리겠지. 옛날에는 퇴근할 때 돈을 자루에 담아 갔다고 하니까. 근데 정말로 어려우면 치대 점수가 왜 그렇게 높겠어. 치과의사들은 지금도 자기 자식들 치과 의사 시키고 싶어 해."
p35
"원장님, 혹시 임플라트 재료들은 가격이 얼마나 하나요?"
"재료? 그거는 얼마 안 해. 픽스쳐랑 어버트먼트랑 하면 10만 원 좀 넘지."
...
"어휴, 외산은 엄청 비싸지. 나는 제일 비싼 스위스 꺼 쓰거든. 27만 원에 들어와."
광호는 흠칫 놀랐다. 질문 하나를 더 하려다 선을 넘는 것 같아 속으로 삼켰다.
'똑같은 수술에 재료만 10만 원 더 비싼 걸 썼을 뿐인데 왜 100만 원이나 비싸지는 거죠?'
p52
100만 원은 광호가 임플란트 재료값과 병원 임대료와 직원들의 인건비 등을 모두 고려해서 결정한 가격이었다. 그렇게 정해도 여러 진료 중 가장 수익이 많이 남았다.
p126
지역협회를 비판하는 치과의사들도 있기는 했다. 배신자들에 대한 처단을 너무 티가 나게 했다는 지적이었다.
p145
당시 정부는 스케일링과 틀니 치료를 건강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었다. 스케일링은 보통 몇 만 원 정도의 가격에 빈도가 높아 병원 수익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는 항목이었다. 틀니 역시 임플란트에 밀리긴 했지만 여전히 치과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다. 건강보험 적용 대상이 되면 이들의 가격이 절반 이하로 내려갈 것이 분명했기에 치과의사들은 걱정하고 있었다.
p172
"갑질을 이렇게 대놓고 하는 데는 처음 봤어. 신문기사에 문자에 이메일까지 정황은 충분히 넘쳐. 해볼 만 해. '값싼 진료를 제공하는 치과의사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우월한 지위를 이용한 갑질로 괴롭혀온 치과협회! 목적은 임플란트 가격 담합! ..."
p224
"치과의사가 제일 힘든 게 뭔 줄 알아?"
...
"사람 대하는 일이 제일 힘들어. 진료도 물론 어렵지만 환자와 직접 얼굴을 마주하면서 신뢰를 쌓는다는 게 만만치가 않아. 계속 마찰이 생기는데, 그걸 잘 해결하면 돈독한 관계가 돼. 하지만 한 번 어긋나면 관계가 완전히 깨지기도 해. 그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겪다 보면 치과의사라는 직업에 근본적인 회의가 생겨."
p284
협회의 또 다른 숙원 사업은 치과대학의 정원을 줄이는 것이다. 치과의사 수를 줄여야 기존의 치과의사들이 높은 수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반대로 치과위생과의 정원은 늘리려고 한다. 그래야 치과위생사들을 값싼 월급으로 부릴 수 있다.
p303
어쨌거나 모든 일들은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하지만 광호는 개운치가 않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빠트린 느낌이었다. 이 모든 일은 왜 일어났던가. 진짜 피해자는 결국 누구였던가.
p309
"소설을 써본 적은 있어?"
...
"아니. 하지만 있었던 일 그대로 쓰면 사람들은 소설인 줄 알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