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오. 난 너라는 문제집을 서른 세 해 째 풀고 있어. 넌 정말 개떡 같은 책이야. 문제는 많은데 답이 없어. 삶의 길목마다, 일상의 고비마다, 지뢰처럼 포진한 질문이 당장 답하라며 날 다그쳐.(40쪽)
마흔 여섯 해 째 풀고 있는 나란 문제집도 답이 없다. 때로는 머리에 띠까지 묶고 나서 풀기도 하고, 어쩔 땐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하는 마음으로 설렁설렁 풀기도 하지만 결국 끝까지 포기할 수 없어 매달리게 되는 나란 문제집. 알쏭달쏭, 알것도 같고 영원히 모를 것 같아 두렵기도 한 문제집.
문제집을 한켠에 치우고 집어든 이 소설은 물기가 많고, 말캉말캉 했다. 서른셋, 오영오(5.0.5)라는 매우 수학적 이름을 갖고도 국어문제집 만드는 일을 하는 어느 여성의 이야기. 아니, 그를 둘러싼 외롭지만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오영오는 새해 첫 날 회사에 나올 정도로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 시달린다. 엄마가 폐암에 걸려 일찍 세상을 뜬 것이 담배 피우는 아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미워하는....그러나 아빠가 죽으며 유품으로 남긴 압력밥솥 속 수첩 때문에 외롭던 인생이 조금은 따뜻해 지는 이야기다.
수첩에는 세 명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지만, 영오는 그들을 힘들게 찾아나서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절반쯤은 그냥 끌려서 영오를 찾아온다. 만나게 될 사람은 만난다는 말처럼, 자석이 자신과 다른 극의 자석에 자연스레 끌리는 것처럼.
그 세 사람은 상처받고 외롭지만, 자신의 방법으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차례로 오영오와 만나게 되고 서로 따뜻함을 주고받으며 뾰족한 외로움의 모서리를 둥글게 만들어 간다.
"아버지 말이에요. 수첩에 이름 적어놓은 거."
영오가 말했다.
"아버지도 나만큼이나 혼자였던 거예요."
강주는 영오의 머리를 끌어당기더니 숨이 막히도록 꽉, 껴안았다.(272쪽)
책에는 이 사람들 말고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 한 사람 더 나온다. 아니, 책의 맨 마지막을 보면 이 책의 모든 이야기를 일어나게 한 트리거이자 발화점인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공미지. 열 일곱살이 되었지만 고등학교 진학은 거부한 아이. 미지의 선택에 화가난 엄마는 미지를 쫓아내듯 하지만, 미지는 혼자 지내며 옆집 외로운 할아버지 심부름을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외로운 할머니를 돕기도 하면서 씩씩하게 살아간다.
따뜻한 마음과 넓은 오지랖으로 주위의 외로운 어른들을 연결하고 돕는 미지에게는 부모도 모르는 아픈 상처가 있다. 자신도 모르는 이유로 학교에서 오랫동안 왕따를 당했는데, 그 원인을 제공한 아이가 자신을 원망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의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가혹한 상황에 큰 충격과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미지는 주위의 외로운 어른들과 만나고 그들을 도우면서, 자신의 상처를 조금씩 치료해 간다.
이 소설의 문체는 한없이 가볍고 유쾌하다. 내가 언제나 경탄해 마지 않는 성석제님의 소설처럼 만담같은 해학이 흘러넘친다. 그 속에 비치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위로의 눈길도 닮았다. 한번 손에 잡으니 놓고싶지 않아 다른 일을 치워두고 빨려들어 읽었다.
책속 공미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중학생 딸아이를 떠올렸다. 아이의 학교에서는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그 마음엔 어떤 이야기가 쌓여가고 있을까.....딸에게도 한 번 읽어보라고 하고 싶은 소설이다.
인생에는 답이 없다. 그 대신 사람들이 있다. 나의 0.5, 내 절반의 사람들이.(273쪽)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