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인생을 배우는 학문, 역사
저자 최태성은 너무나 유명한 '역사 강사'다. 고등학교 선생님이었고, EBS 강의 등 방송을 통해 학생들에게도 '역사도 쉽고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얼마 전엔 더 많은 이들에게 우리 역사를 알리고 싶어 학교를 나와 무료 동영상 강의 채널도 여셨다고 한다. 나는 그 분의 동영상 강의는 본 적 없지만 KBS 역사저널 '그날'과 집필하신 책을 통해 저자를 알게되었다.
책과 방송에서 접한 최태성 저자는 무척 따뜻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분 같았다.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비껴서 있지만 누구보다도 진한 땀과 피눈물을 흘린 민초들을 향한 애정이 느껴지는 분이었다. 그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외치는 분이었고, '역사에 무임승차 해서는 안된다'며 역사에 대한 책임을 늘 강조하시는 분이셨다.
이 책 <역사의 쓸모>는 저자가 쓴 최초의 인문학 책이라고 한다. 그 동안 역사적 사실을 설명할 때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배워야 할 점에 대해 빼놓지 않고 언급해 온 분이기에 이 말에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그 동안 역사적 사실을 해설하기 위해 조연처럼 등장했던 최태성 저자의 생각이 주연으로 당당하게 등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역사를 통해 우리는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에 대해 배우며, 다른 사람과 내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에서 배운 역사의 17가지 쓸모
저자는 이 책에서 역사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쓸모가 있다고 말한다.
1. (동학농민군처럼) 실제로 어려움을 이겨낸 사람들의 예를 보여줌으로써 '실체가 있는 희망'을 배우게 한다.
2. (사사오입을 합리화한 헌법학자들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찌질하게 살아간 사람, (구진천처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의 삶을 보여줌으로서 '품위있게 사는 삶'이 무엇인가 알게 한다.
3. (정약용처럼) 현실의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고난을 버티며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마침내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음을 알려준다.
4. (선덕여왕처럼) 지도자는 공동의 비전을 세워야 하며 그것을 소통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5. (연개소문처럼) 아무리 강력하고 위대한 인물이라도 겸손하지 못하면 한 방에 훅 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6. (서희처럼) 배짱을 가지고 섬세하게 상대를 관찰하면서 본인의 패를 놓지 않는다면 결국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는 것을 배운다.
7. (장수왕처럼) 체면보다는 때로는 실속을 챙겨야 할 때가 있음을 배운다.
8. (정도전처럼) 이미 검증된 인생 멘토를 얻을 수 있다.
9. (김육처럼) 인생을 던져 이루고 싶은 목표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된다.
10. (장보고처럼) '흙수저'라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만 하지 않고 더 큰 꿈을 꿀 수 있도록 해 준다.
11. (박상진처럼) 동사형인 꿈을 꾸게 해 준다.
12. (이회영을 보며) 한 번 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해 보게 해 준다.
13. (이원익이나 최석처럼) 자기중심을 잡고, 자아정체성을 확립하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게 해 준다.
14. (어우동이나 나혜석의 예를 보면서) 시대의 변화와 젠더 감수성에 눈뜨게 된다.
15. (예송논쟁을 보며) 내 열정은 과연 온당한 것인가 점검하게 된다.
16.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보며) 시민으로서의 책임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17. (경주 최부자집을 보며) 함께 사는 세상의 중요성에 대해 배우게 된다.
두껍지 않은 책, 그러나 묵직한 울림
책을 읽으며 여러 지점에서 울컥했다. 솔직히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처음 읽는 이야기도 많았고, 그만큼 느낀 것도 많았다. 특히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대해 읽을 때 그랬는데, 나라면 어땠을까 감정 이입이 크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 북서부까지 흘러가 고된 노동을 하다가 러시아 혁명으로 갈 데 없어진 조선인들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구하려고 사력을 다한 부분을 읽다가는 정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저자의 인간적인 면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들에서도 큰 감동을 받았다. 이회영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는 부분, 농민군이 옷 속에 부적을 붙였다는 글을 보고 '얼마나 무서웠을까'하고, 짠하다고 연민하는 부분, 태극기 부대를 보고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이라 그럴 것'이라며 이해를 시도하는 부분, 미투운동에 자신도 몰랐던 가부장적 생각 때문에 불편함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부분에서 특히 그랬다. 그리고 초임 교사 시절 선도하려고 애썼지만 별 효과가 없었던 소위 '문제아'였던 아이가 백화점에서 훌륭한 판매원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의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부분에서도....
그리고 생각이 깊어졌다. 내 작은 인생이 역사에 포착되었을 때 당당할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살고자 하는 인생이 그러한 방향 위에 있는가 하고. 역사는 지금도 조용히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고 있을테니 말이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담긴 생각만큼은 저자가 낸 어느 책보다 묵직하다. 이토록 쓸모 있는 역사를 좀 더 공부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건 물론이다.
<책 속에서>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 수 없기에 그때마다 막막하고 불안하지요. 하지만 우리보다 앞서 살아간 역사 속 인물들은 이미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의 선택을 들여다보면 어떤 길이 나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할 것인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11)
-그러지 말고 역사 속에 들어가서 인물들과 만나보면 좋겠어요. 그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보세요. 꿈이 뭐예요? 왜 그런 일을 했어요? 그 선택에 후회는 없나요? 꿈이 이뤄진 것 같나요? 이렇게 물어보고 답을 상상해보는 겁니다. 나라면 어땠을까 하고 내 삶에 대입시켜서 답해보는 거죠. 그러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얻지 못했던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35)
-역사는 실체가 있는 희망입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조금 더 살아보자고, 버텨보자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조금만 더 멀리 봤으면 좋겠어요.(50)
-"진실로 너희들에게 바라노니, 항상 심기를 화평하게 가져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다름없이 하라.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라서, 한번 쓰러졌다 하여 결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정약용이 자식들에게 당부했던 말)"(79)
-혼자만의 비전은 몽상이나 망상으로 그칠 수 있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됩니다.(87)
-제가 학교에 있을 때 느낀 것 중 하나는 본인이 속한 집단 안으로 시야를 좁히면 쉽게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91)
-저는 소수를 위한, 소수의 권익을 대변하는 기술은 역사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자유의 확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어요. 폭발력을 지닌 창조적 발명은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수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117)
-다 포기하고 될대로 되라지 하고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 얻어야 할 것을 빠르게 계산했습니다.(132)
-역사는 과거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학문입니다...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감하고 이해하는 연습을 하게 됩니다.(139)
-그러니 상대방에게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주길 원하면 안됩니다. 대신 찰떡같이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해요. 내 메세지를 찰떡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역사입니다.(164)
-그래서 저는 역사 속 인물을 멘토로 삼습니다. 그리고 농담처럼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미 검증된 분이라 걱정이 없다고요.(170)
-정도전처럼 시대와의 불화로 나락에 떨어졌을 때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사회와 자신에 대한 인식과 비판의 불을 항상 환하게 밝혀놓았으면 합니다.(179)
-인생은 단 한 번 주어지는 것입니다....저는 김육이 '한 번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자신의 일생으로 답했다고 생각합니다.삶을 던진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는 분이죠. (191)
-삶의 가능성이라고 하면 굉장히 거대한 말 같지만 사실은 몹시 연악한 말이기도 해요. 다른 사람의 가능성과 비교하면 상처 입기 쉽거든요.....그래서 비교는 오로지 나 자신과만 해야 합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른의 내가 더 잣기를 또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내가 더 나아지기 바라는 거죠.(202)
-그런데 대체 무엇을 위한 도전이고 무엇을 위한 용기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 최종 종착지는 동사의 꿈이었으면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삶에서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214)
-그런데 만약 일제감점기에 외울 게 없다면 그 역사는 어떤 역사입니까? 고작 몇 개의 단체와 몇몇 사람의 이름만 존재한다면 말이죠. 그런 역사는 비겁의 역사입니다. 우리 후손에게 보여주기도 민망한 굴욕의 역사인 것이죠.(221)
-저는 늘 사람들에게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말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앞선 시대의 사람들에게 선물을 받은 만큼 뒤이어 이 땅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해주고 싶어요. 그리하여 훗날 눈을 감는 순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일생으로 답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226)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러 논쟁거리가 있습니다. 어떤 논쟁은 엄청나게 뜨거워요. 입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이념이 다른 사람 사이에 살벌한 말들이 오가지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게 그만큼의 에너지를 쏟을 정도로 우선순위게 있는 일인지 말이죠(267)
-도처에 갈등 요인이 널려 있는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에게는 당면한 문제에 나의 온도를 몇 도로 맞출 것인지 조절할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합니다.(268)
-3.1운동은 시대를 구분 짓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이때부터는 대한'민'국의 시대입니다. 말 그대로 민의 나라가 탄생한 것입니다.(272)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며 크게 감명받은 문구가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관계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었어요. 어떤 사람과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면 안된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인지 그날 깨달았습니다.
-인류는 분명 이전보다 더 많은 자유를 확보하며 전진하고 있습니다. 긴 호흡으로 역사를 바라보면 결국은 사람과 세상에 대해 낙관적인 시각을 갖게 됩니다.(290)
-역사를 공부한 사람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것입니다. 과거보다 현재가 나아졌듯이 미래는 더 밝을 거라고. 역사를 통해 혼란 속에서도 세상과 사람을 믿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우리가 공부하는 건 역사지만 결국은 사람을, 인생을 공부하는 것이라고.(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