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젊은 귀족에게 평생 머물고 있는 호텔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선고가 내려졌다. 한 걸음이라도 호텔 바깥으로 나가면 그는 총살이다.
평생을 집안에서만 살라고? 코로나바이러스 덕분에 자가격리다, 재택이다, 집콕에 진저리가 나는 요즘 썩 유쾌한 주제는 아니었지만 정말 그렇게 살 수가 있을까 궁금해서 산 책이었다.
제정 러시아 시대의 귀족인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은 넓은 영지의 저택에서 승마와 사냥을 즐기고 살았다. 혁명은 그에게 가족과 재산을 빼았아갔다. 거기에 그는 모스크바 메트로플 호텔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종신연금형을 선고 받았다. 거처도 스위트룸에서 직원들이 쓰는 작은 방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거나 피폐해지지 않는다. 호텔 식당의 헤드 웨이터로 일하면서 신사의 태도와 귀족의 품격을 유지하고 살아간다. 자신의 손바닥만한 호텔 방의 옷장 뒤벽을 뚫어 쓰지 않고 있는 옆방과 연결하여 서재를 만든다. 그는 꼬마 숙녀의 놀이 친구, 유명 배우의 숨겨진 연인, 공산당 간부의 개인 교사가 된다.
이 책은 이념, 가족, 우정, 사랑, 스릴 등 온갖 재료가 잘 조화된 섞어찌게이다. 그 중에서 내게 입맛을 다시게 한 재료는 ‘몰락’이었다. 역사와 책에서 보는 몰락이나 실패 이후의 삶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늘어난 음주량, 대인기피와 망가지는 가족 관계로 묘사된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현실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좋든 싫든 개인을 정의하는 한 축은 그 사람의 일과 재산과 신분이다. 우리는 대박과 신분 상승을 공상해 보기도하지만 순식간에 일과 재산을 잃는 영락의 불안을 생각하기도 한다. 불안 보다 공상이 더 즐겁기도 하고 확률도 훨씬 높다고 생각하지만 요즘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한달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전염병 때문에 무급 휴직과 희망 퇴직이 강요되고 또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는 세상이 아닌가.
사회적 경제적 몰락이 존재의 몰락은 아니다. 하지만 쌀이 없다고 사냥하고 채집해서 먹고 살 수 있는 세상도 아니다. 몰락했을 때 내 존엄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그 이전에 내가 지켜야 할 존엄이 무엇인가.
약간 심각한 이야기를 늘어 놓았지만 이 소설은 대단히 재미있다. 뒤로 갈수록 더 재미있다. 번역도 뒤로 갈수록 좋아지지만 후반에도 약간의 비문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사의 점잖은 유머에 한 템포 늦게 웃는 재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