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카테고리
현실을 넘어서 -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
croyance
2000.05.12
댓글 수
1
브르통은 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시를 낳는 중요한 요소는 서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두 개의 사물에 대한 비교, 혹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돌발적이고 충격적으로 이 둘을 대치시키는 것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우리 시단에서 이와 같은 경우에 가장 가까이 근접한 시인이 이성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나는 이성복의 시를 읽을 때마다 마그리트(벨기에 태생의 초현실주의 화가)의 그림이 연상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초현실주의라고 하고 본인 또한 그것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인정하는 터라, 그런 연유로 인해 브르통과 마그리트를 인용하려 한다는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분명히 오산이다.
오히려 나는 이성복의 시가 초현실주의라기 보다 리얼리즘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리얼리즘의 의미와는 다르다. 그의 시는 결코 상징이나 신화를 다루지 않으며, 그렇다고 보이지도 않은 것을 꿰뚫어 보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현실을 주의 깊게 통찰함으로서 얻어지는 본질을 충실하게 전달할 뿐이다. 다시 말해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고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것들은 그는 들추어내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에게 그 비밀을 인도해 주었던 사물의 리얼리티를 떠나서는 안 된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초현실주의 화가라 불리 우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면서 내가 초현실주의라 생각하지 않듯이, 이성복의 시를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의 느낌을 받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아무튼 이성복은 보기 드문 독특한 시인이다. 그가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할 때 한 번 튀어보기 위해서 그런 건지, 그런 식의 방식 이외의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도저히 쓸 수 없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이전에 이가림의 시를 평하면서 인간에게는 누구나 철학적 구원을 받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가 있다고 했으며, 그리고 그것은 도저히 찾을 수 없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찾아가야 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라고 언급한 적이다. 이성복의 시도 마찬가지다. 두 작가의 시가 모두 바슐라르가 지적하듯이 어머니 뱃속에서 쫓겨 나온 데 대한 후회라는 '요나 콤플렉스'를 다루고 있다. 즉, 인간 존재 근원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이가림은 서정적인 고향에 대한 향수로 표현한데 비해 이성복은 매우 애매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이성복 시의 강점이다. 왜냐하면 때론 어리둥절함이 평상시의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성복 시의 매력이 아닐련지...
어머니의 자궁으로 상징되는 그 편안하고 안락한 곳. 인간은 그곳에서 나왔지만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기에 오히려 더욱 강렬한 충동과 그리움이 느끼기 마련이다. 그리고 인간은 제대로 회귀하지도 못한 채 영원회귀만을 반복적으로 하게 된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거야말로 인간이 타고난 비극인 셈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짊어지는 비극 말이다. 그러므로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은 참으로 치사하고 구차스럽다. 정말 어떨 때는 사는 것조차 못마땅스러운 경우가 있다.(다른 이들은 몰라도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렇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깨끗해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덜 더러워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끔찍하게도 그것은 영원히 반복되어 지는 것인가? 아무런 새로움도 달라지는 것도 없이... 이성복의 시를 읽고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