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작품을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눈다면, 이 <크눌프>는 초기의 말기쯤 될까? <수레바퀴아래서>가 초기의 초기로 보면 될 것같고, 한스 기벤라트는 10대의 나이였고 크눌프는 40대가 되었다.
한스는 방랑의 초기, 크눌프는 방랑의 마무리, 둘 다 죽음으로 끝이 난다. 죽는 것에 대해서 독자인 나로서는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죽어야 하는가? 죽음이 의미하는 바가 뭔가? 헤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즉 육신의 소멸이 아닌 하나의 마무리, 완결을 의미하며 새로운 탄생을 위한 준비라는 생각이 든다. 한스와 크눌프를 하나의 선상에 놓아도 되고 그렇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방랑자, 혹은 나그네, 여행자로서의 크눌프는 어딘가 낯이 많이 익다. 독일적 정서가 가득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독일적 정서라는 게 뭔가? 독일정서라고 단정지을 수는 있는가? 여행자 혹은 방랑자라는 설정이 그렇고 두 번째편의 묘지에서의 휴식 장면이 그렇고 눈 속에서의 죽음의 장면이 그렇다. 여행자설정은 독일 문학들에서 꽤 많이 나온다. 특히 묘지 장면이나 백양나무 아래서의 꿈 이야기는 빌헬름 뮐러의 <겨울 나그네>를 떠 올린다.
여관 (Das Wirtshus)
길이 나를 데려다 준 곳은
공동묘지였네.
이곳에 묵어야겠군:
나는 속으로 생각했네.
너희 푸른 장례의 화환들은,
지친 나그네들을
서늘한 여관으로 안내하는
표지판처럼 보이는구나.
그런데 이 여관에는
방이 모두 찼는가?
난 지쳐 쓰러질 지경인데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어.
아, 이 무정한 여관아,
넌 나를 받아주지 않니?
그렇다면 그냥 가자, 가자,
나의 충실한 지팡이여!
(빌헬름 뮐러 <겨울 나그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