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첫머리에 이 책 <이아생트>와 앞의 책 <반바지 당나귀>와는 연관성이 많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런가. 읽어갈수록 <반바지 당나귀>가 떠 오르는 건 왜일까? 처음부터 중반까지는 말그대로 별로 연관성이 없나보다 했는데 중간이후로 넘어가면서, 이아생트가 나타나면서 반바지 당나귀의 굴레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전편에 출연했던 콩스탕탱, 이아생트, 쉬프리엥이 나오고, '나'는?
지상천국 '벨뛸'을 만들려다 실패하고 십수년에 걸쳐 다시금 쉬프리엥은 지상천국 실바칸을 건설하지만 거기에 살아야할 아담과 이브인 콩스탕탱과 이아생트는 없다.
읽으면서 가장, 그리고 계속적으로 궁금했던 것이 '나'의 정체였다. 물론 끝까지 '나'가 누구인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나'는 누구이며 왜 성가브리엘 고원에 갔는가? 거기서 무엇을 찾는가? 혹은 기다리는가? 왜 성가브리엘 고원인가? 라주네스트의 등불의 주인은 누구인가?
처음에는 '나'는 전편의 주인공인 콩스탕탱인 줄 알았다. 그런데 라주네스트의 주인이 콩스탕탱이라는 말과 이아생트가 콩스탕탱을 만나 어디론가 떠났다는 얘기로 보면 '나'는 콩스탕탱이 아닌데, 그러면 "상상적인 기억으로부터 나는 아직 나자신에게서 알지못했던 그러나 결코 낯설지 않은 어린 시절을 끌어냈다. ......아주 어린 소녀 이아생트....이 이상한 고장의 시간속 어딘가에는 언덕들 가운데 외딴 정원이 있었다." 이아생트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콩스탕탱과 쉬프리엥노인 밖에는 없는데... '나'가 그 두사람중 하나가 아니라면 .. .
결국 작가 자신 밖에는 없다. 그러면 작가 자신이 소설의 세상속으로 들어간 것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 기법은 미겔 데 우나무노가 세르반테스의 영향을 받아 쓰던 기법이다. 소설 속 인물이 작가를 찾아오거나 작가가 작중인물에게 가기위해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것. 쉬프리엥의 시도, 이아생트의 행적이 궁금하고 작가자신도 알지 못했던 이후의 것들이 궁금해 소설 속으로 들어가 실바칸을 찾아간 것이 아닐까?
그러면 성가브리엘 고원은 무엇인가? 작가와 쉬프리엥이 추구하는 것은 동일한데 작가는 성가브리엘 고원에서 답을 찾고 있었고 쉬프리엥은 실바칸에서 답을 찾고 있었다고 할까? 어쩌면 둘다 답을 찾지 못했는데 그 답은 이아생트와 콩스탕탱이 가지고 있는데, 둘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으니.
살아있는 세상도 아닌 것같고 죽은 세상도 아닌 것같은 성가브리엘고원, 절대고독, <반바지 당나귀>에 "영원히 고독할 때만 진정으로 고독하다고 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죽은 후에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이 헤메는 그런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겠다. 절대고독은... 아닌가? 세상과 연결하는 고리는 있으니, 음식을 공급해 주는 멜라니 뒤루테아.
"나는 내 안에서, 내 존재의 숙명위에 매달린 나자신 안에서 말고는 아무런 무게도 나가지 않았고, 추억도, 염려도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나 이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 내 안에서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지속하되 깊이로 지속하고 있다는 기이한 느낌을 가졌다. 나는 내려가고 있었다."
"이제 나는 철저히 헐벗었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산다는 것에 대한 긍지라고는 없다. 심지어 내 헐벗음에 대한 애증조차 없다......
나는 내가 한때 세상을 사랑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제 아무런 구원이 없다. 불모의 세상이다.
나는 세상 그 이상을 사랑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무도 내개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