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겨울밤
안태운
이윽고 겨울밤이라니, 이윽고 겨울밤, 이윽고 겨울밤. 겨울밤의 이미 한가운데에서 나는 이윽고 겨울밤이라고 혼자 중얼거려보았다. 겨울밤의 행위자가 되어서 떠나고 산란하고 이윽고 겨울밤이라니, 나는 끝없는 겨울밤의 몸속을 휘젓고 다니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렇게 겨울밤의 몸속에서는 내 생물이 순간적으로 불어났다가 사라지고 또 사라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 같았지. 그러므로 몸속을 계속 걸어갑니다. 거닐면서 맞부딪친 생물들에 휩쓸리고 휩쓸려 넘어지다가 일어나면 그것들을 다시 좇을 것이다. 밤공기를 따라서. 매번 따라간다면 불쑥 겨울 밤공기를 스치는 얼굴들이 떠오르고 내가 그 얼굴이 되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니까 그 얼굴의 얼굴이, 얼굴로 파생된 얼굴이 되어봐도, 아니라면 내가 밤공기라고 자처하면서 밤공기의 퍼져나감이라고 밤공기의 흩어짐이라고 아스라함이라고 내 몸을 피해서 나아갈 거라고.
그 후 나는 멈칫했지. 흔적을 남기지 않을 거야, 그렇게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모습으로 내 겨울 풍경은 성사되는 것 같았다. 이윽고 겨울밤의 몸속에 주저앉아 있으면 온갖 상념이 나를 휘감을 거야, 궤적 없는 그리움이 자리 잡을 것이고 무엇이든 은유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겨울밤 나는 서서히 잠들었어, 이윽고 녹아 있는 듯했고 스며드는 듯했고 겨울밤 나는 잠들며 겨울밤마저 잠들게 하는 것 같았나. 다 잠드는구나. 잠들면 잠들 수 없네. 빠져나갈 수 없네. 그렇게 녹아내리는 이미지 속에서 나는 감싸고 있는 듯했지. 감싸면 무언가를 돌보고 있다는 감각, 물듦과 증강의 이미지가 계속 흐른다. 그게 낯설었나. 그러니까 내가 누군가를 돌볼 수도 있다니, 너를 안아 어르고 달래고 먹이고 씻기다니, 오랫동안 그렇게 해나가면 너는 점점 커나갈 거라. 커나가면서 너는 혼자 세면대에서 물을 받은 채 서있을 수도 있었고 고개를 숙인 채 물속으로 얼굴을 담그며 숨을 참을 수도 있었는데. 그때 떨어지는 속눈썹, 속눈썹, 속눈썹. 너는 물속의 그것을 손가락으로 건지려 안간힘을 썼으나 아무리 해도 잡히지 않았어. 그러므로 물을 빼냈지만 함께 빨려 나가는 속눈썹, 속눈썹.
한동안 너는 망연한 표정으로 있었지. 이윽고 겨울밤 너는 다 잊은 양 제 눈꺼풀에서 속눈썹 하나를 떼어낸 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러고 있으면 산란하는 이미지 속, 너는 나를 응시하는 듯했고 이미 다 자라난 것 같았는데…… 나는 쉿, 비밀이라며 다 큰 너를 계속 돌볼 수도 있을 것 같았나. 계속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나. 이제 잠들 수 없고 이윽고 겨울밤이고 누구든 살길을 찾을 테지. 너는 외출을 할 테지. 누구든 생계를 이어나갈 테고, 누구든 문을 열고 나가 겨울밤 밖에서 얼고 있는 것들을 다 안으로 들일 테지. 이윽고 겨울밤, 돌아와 녹고 있는 것들을 멍하니 바라볼 것이다. 그게 무엇이었는지. 얼고 녹는 것이 무엇인지. 이윽고 겨울밤, 이윽고 겨울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