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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기후

[도서] 미기후

이민하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목이 너무 아파서 눕는 것조차 할 수 없어 소파에서 밤을 새웠다. 통증은 계속 됐다. 그렇게 며칠을 참다 ER을 갔다. 통증을 느끼는 부위가 왼쪽이었고, 목은 뇌와도 이어져 통증이 커질수록 두려움도 증폭됐다. 다운타운의 ER은 일반 환자들이 들어가는 입구가 있지만, ER의 어느 시점 이상 들어가면 경찰과 함께 온 범죄자들이나 그 범죄의 피해자들과 한덩어리가 된다. 화장실에 들어가다 피칠갑을 한 수갑 찬 사람과 스쳤을 땐 며칠간 계속 된 고통마저 잊을 정도였다.

한참만에 만난 의사는 이런 저런 검사를 하더니 아무것도 아니라며 근육이완제를 처방해줬다. 눕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통증이 너무 심하다고 호소했지만 근육 스트레칭을 자주 하라는 말만 했다. 아이고, 의사 양반. 내가 매일 요가를 한다고. 스트레칭을 안 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너무 답답했지만 벽에 대고 말을 하는 참담한 기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게 막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을 2020년이었는데, 코로나 백신을 맞고 심장이 아파서 심장 전문의도 찾아가고, 그 해엔 이런 저런 몸의 고통들로 뇌 전문의, 간  전문의, 류마티즘 전문의도 차례차례 만났다. 그때마다 의사들은 아무 의상이 없다고 했고, 아프면 진통제를 먹으라는 무성의한 대답만 들었다.

 

그렇게 4년 여가 지난 지금에서야 든 생각은 아마도 그 즈음부터 갱년기였던 것 같다. 몇 년간 여성과 전문의나 가정의학과 전문의, 대체의학을 하는 의사 등등이 쓴 다양한 책들을 찾아 읽어본 후 얻은 결론이다.

 

어떤 책에선가 오프라 윈프리의 일화를 소개했는데, 오프라 윈프리가 언젠가부터 여기저기가 너무 아파서 병원엘 갔단다. 최고의 병원, 최고의 실력을 가진 의사였는데, 마치 그녀를 꾀병 환자인 것처럼 다뤘다. 왜냐하면 검사 결과로는 모든 게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답답한 오프라는 사방팔방 알아보다 그 책을 쓴 의사를 찾아가게 되고, 자신의 문제가 갱년기 여성들이 겪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때부터 치료가 시작된다.

이런 경우는 매우 허다하다.

대부분의 책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건, 의외로 의사들도 여성의 몸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 여성의 생애주기에 따른 신체적 변화나 고통에 대해 무지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산부인과 의사들조차 갱년기나 폐경기에 대해 잘 모르고 무관심하다는 거였다.

이게 말이 되나? 세상의 반이 여성이고, 그 여성들은 결국 어느 시점에서 갱년기나 폐경기를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되는데 말이다.

여성호르몬이 줄어들면서 나이 든 여성들이 유방암이나 자궁암, 심장질환이나 뇌질환에 많이 노출된다는 사실도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뇌출혈이나 뇌졸중으로 고생하는 중년과 노년 여성들이 상당히 많아서 깜짝 놀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만약 이것이 남성의 일이었다면 어땠을까? 벌써 오래전에 공론화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솔루션들이 이미 제시되지 않았을까?

 

심지어 여성인  나조차 이것이 내 문제가 되기까지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살았다. 철저히 무관심했다. 내 문제가 되고,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을 때야, 이것들이 나만 겪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 미약하지만 이런 문제들을 타개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들을 누구보다 절실하고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민하의 시집은 항상 조금 어렵고 불편했다. 그건 아마도 내게는 생경하고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이 출간될 때마다 계속 구입하고 읽기는 했다. 

이번 시집은 이전의 시집보다 덜 생경하고 덜 낯설게 느껴졌는데, 그건 아마도 내가 이민하의 목소리를 비로소 제대로 듣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장황하게 이야기한 것들을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여성들은 항상 고통당하고 신음하고 비명을 지르는데, 대부분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누군가에 가 닿지 못한다. 심지어 같은 여성에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이민하 시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민하가 시를 쓰는 이유는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과 다른 여성들의 생존. 누군가 지금 여기서 고통스럽게 생존하고 있다는 S.O.S. 

그 타전을 이제서야 뒤늦게 수신한 나는 다소 황망하고 미안한 마음이 크지만, 한편으로는 안심도 된다. 내가 결코 이상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인정을 받은 것 같아서.

우리는 원래 이런 존재야. 이렇게 살고 있어. 이것이 우리가 사는 방식이야.

나를 이상하고 낯설게 보던 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네가 무관심하고 무지한 거야. 잘못은 네가 있어, 이 바보야.

 

덧. 개인적으로는 「Sound Cloud」와 「죽음이 삶에게」가 가장 맘에 든다.

「죽음이 삶에게」를 통해 이승훈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됐다. 이 시에서 인용하고 있는 선생의 『환상의 다리』를 구입하려고 했는데, 무슨 연유인지 인터넷서점들에선 아예 검색조차 안  된다. 선생의 다른 시집들이 세 권 있지만 이 시집은 없는데, 안타깝다. 그렇게라도 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빌고 싶었는데. 참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울지 마.

별 수 없어.

 

곧 나아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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