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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하라

[도서] 점령하라

주디스 버틀러,슬라보예 지젝 등저/우석훈 편/n+1 편/유영훈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3점

이 책은 이론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참관기에 가깝다. 실제 점령 운동 참가자들이 쓴 글이기 때문에 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풍경과 실질적인 쟁점들이 나온다. 예컨대 공개총회에서 벌어지는 즉흥적이고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 필요에 따라 소규모 작업그룹을 만들어가는 모습들, 경찰이 시위대를 공격하는 생생한 광경들이 그려진다. 또한 점령지를 예전부터 점령하고 있던 노숙자들과의 관계 문제, 타악기를 두드리며 흥을 돋구기도 하지만 회의를 방해하는 드럼 서클 문제, 무정부주의 성향의 과격파 젊은이들 문제 등이 쟁점으로 묘사된다.

책의 구성이 흥미로운 건 참관기 사이사이 다소 개념적, 이론적인 글들이 채워져있다는 점이다. 참관기에서 제기하는 어떤 문제점은 다음 챕터에 실린 다소 이론적인 글에서 설명된다. 참관기만으로 채워졌더라면 다소 산만하고 감상 위주로 제한될 수 있었을 텐데 이론적 글들이 이 점을 보완하고 책을 더 풍부하게 해준다.

참관기 중간의 이론적인 글들은 대개 <n+1> 편집진들이 썼다. 책날개에 저명한 사회비평 잡지라고만 소개되어 있어서 대체 어떤 잡지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책 말미에 가서야 각주에 <n+1> <월가 점령 가제트>의 모() 잡지라고 소개되어 있다다시 정리하면 이 책의 편집자들은 월가 점령 시위 현장을 처음부터 소개해오던 <n+1> 편집진이라는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알게 되는 사실인데, 시애틀, 애틀랜타, 뉴욕의 점령 운동 참관기의 상당 부분을 쓴 이들은 자매지간이다. 아마도 마흔은 넘은 걸로 추정되는데, 멀리 떨어진 세 지역에서 나이도 적지 않은 자매들이(게다가 한 명은 휠체어에 의존하고 있다) 같은 꿈을 품고 점령 운동에 참가했다는 점은 높이 살만 하다.

세 자매의 참관기와 <n+1> 편집진들의 글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탓에 글쓴이들은 샘플링에서 대표성이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은 일관되게 한 가지 성향을 보여준다. 예컨대 무정부주의와 폭력주의에 대해 일관성 있게 반대하고 있는데, 이러한 입장은 일기를 기록한 참가자의 글에도, 편집자들의 이론적 글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이 책은 월가 점령 시위에 관한 포괄적인안내서라고 할 수는 없다. 편집자들의 정치적 편향이 드러나 있으므로 독자들은 그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물론 크게 보아 세상에 비정치적인 글은 없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 책은 적어도 다양한 정치적 관점을 포괄하여 소개하려는 의도는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Occupy Wall Street는 자발적 운동이다. 자발적 운동은 그 나름대로의 장점과 의의가 있겠으나 이 책의 어느 글에서도 소개하듯이 사회운동에서 자발성과 무형식을 지향했을 때 나타나는 무구조의 횡포(the tyranny of structurelessness, pp. 79-82 코프먼의 글 참조)에도 주의해야 한다. 혹은 그 반대로 무구조를 지나치게 구조화하려는 시도 또한 운동의 장점이나 방향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수도 있다. 볼셰비즘은 러시아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동력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혁명을 중단시켜버린 장애물이기도 했다. 지도부의 상상력이 민중의 혁명적 역량을 구속해버릴 때 혁명은 정체되고 지도부의 아집만 남는다. 최근 벌어지는 통합진보당 사태도 지도부를 사유화하려는 NL의 가부장제적 발상 때문이 아닌가? 그러고보면 NL은 진보보다는 수구와 더 친화력이 있는 것 같다.

점령 운동에서도 정체불명의 지도부의 주도권이 커지는 것을 보게 된다. 뉴욕 주코티공원 점령자들은 주로 공개총회를 통해서 의사결정을 하지만 점령자 숫자가 늘면서 소수가 장막 뒤에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집단이나 사회의 규모가 커지면 결국 이것을 관리할 지도부가 생겨나는 것은 필연이다. 운동 참가자들의 생각, 문제 의식, 참여 정도, 목적, 정치적 신념 등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운동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목소리를 규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지도부는 운동 참가자들의 상상력을 배가시킬 수 있는 윤활유 역할을 해야 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점령 운동의 의의는 무엇인가? 가장 낮게 평가한다 해도 “1퍼센트 대 99퍼센트그리고 점령이라는 어젠다 혹은 프레임을 세웠다는 점은 큰 의의이다. 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점령 운동이 일어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1%가 부를 (사악한 방식으로)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버릴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점령 운동은 이제 출발점에 서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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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컬리

    99% 운동으로의 재구성. 요새 진보의 화두 중 하나지요. 잘 봤습니다. 이토록 꼼꼼하게 오타까지 찾아 수정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 출판사에 보내시지 그래요? ㅎㅎ

    2012.05.14 08:48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책읽는낭만푸우

      운동에서 언어 프레임이라는 게 중요하기는 한데 1% 대 99%라는 프레임이 오히려 중상층의 극보수화를 자극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2012.05.14 12:12
    • 파워블로그 책읽는낭만푸우

      해당 출판사의 까페에 남겼는데 아직 별 응답이 없군요. 본다면 반영하겠지요.

      2012.05.14 12:19
  • 파워블로그 eunbi

    아... 이 책이 이런 내용이었군요... 제목이 별로 맘에 안들어 관심도 안두었던 책인데... 그런데 교정은 초벌만 봤을까요... 지금 읽고 있는 책도 번역이 정말 말이 아니던데... 영어실력에 문장력이 있어야 번역가로 활동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2012.05.15 16:47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책읽는낭만푸우

      네... 이 책이 이런 내용이에요. ^^ 번역은 영어 실력은 어느 정도만 있으면 되고 무엇보다 국어 실력이 좋아야 할 것 같아요. 둘 다 실력이 좋다면 금상첨화겠지만..

      2012.05.16 04:27
    • 파워블로그 책읽는낭만푸우

      예를 들어 'occupy'를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할 것이냐도 논의의 여지가 있겠죠. 어떤 단어를 이용해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뉘앙스에서부터 운동이 가진 의의나 역할 등에 대한 평가까지 모두 반영, 포함되는 거니깐요. ^^

      2012.05.16 06:32
  • 시의성 때문에 급하게 번역, 출간해서인지 오타 및 오역이 종종 보인다.
    pp. 14-15 목차를 보면 ‘점령 풍경 10’ 다음부터는 실제로 점령 풍경이 아닌데도 ‘점령 풍경 01’이라고 소제목이 잘못 붙은 게 몇 개 있다.
    p. 17 중간. 점거하는 하는 → 점거하는
    p. 24 주4. 부룩필드사 → 브룩필드사
    p. 45 중간. 한 통의 이메일 한

    2012.11.21 12:46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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