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로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다가 7~8년 옥고를 치루었으나 광복 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사형이 집행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죽산 조봉암 선생의 기일이 52년이 흘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지난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한 비운의 정치인 죽산 조봉암(1898~1959)에 대해 국가변란과 간첩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이로써 그는 사형집행 52년만에 간첩 누명을 벗게 된 것이다.
뒤늦게나마 억울한 죄명을 벗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다 할 것이지만, 당시의 재판 과정을 보면 정말 기가 막힌다. 평화통일을 주장한 죄, 조작된 간첩 양면산으로 정치자금을 받은 죄목 등 1심 재판에서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5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는 간첩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그리고 마지막 대법원에서도 재심청구가 기각됨에 따라 사형을 선고 받고 끝내 형 집행이 이루어 지고 말았다. 검찰이 기소한 혐의내용의 진실 여부를 떠나 보통 1심 재판에서 구형된 형량은 2심, 3심으로 갈수록 낮아지거나 최소한 같은 수준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재판은 오히려 5년형에서 사형으로 치닫고 있으며 형 집행 역시 마지막 선고일 다음날인 7월 31일이었다. 독립운동가로 제헌의회 의원과 초대 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 등을 지내고 진보당을 창당하여 대통령 후보로 나선 투표에서 216만표를 차지하면서 이승만 독재정권에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그는 결국 4.19민주화 혁명이 일어나기 아홉달 전에 아쉽게 '사법살인'을 당하게 된 것이다.
죽산 조봉암의 평전을 읽으며 내가 분노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 본질과 관련없는 정치적 이유에 의한 억울한 죽음에 대한 것이다. 비열한 권력욕에 눈 먼 이승만과 그 일파는 치졸한 수단과 방법을 통해 유력한 경쟁자를 법의 이름으로 제거했으며, 후일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벌어진 '인혁당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선례를 제공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물론, 김구, 여운형 선생 등 이승만 권력에 방해가 된다면 테러, 암살까지 자행되던 시점에서 공작에 의한 사법살인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당연시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평생을 그의 명예회복에 힘써 온 죽산의 딸, 조호정 여사는 이제 팔순의 노인이 되었다. 그녀는 최초의 문민정부 탄생인 김영삼 정부 출범시 자신의 부친에 대한 명예회복을 간곡히 청원했으나, 이는 정부가 나서서 행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차가운 답변만을 받았을 뿐이라 애통해 했으며,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문제를 재조명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가 바로 지난 달 20일에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 사민주의(사회민주주의 혹은 민주사회주의)의 시초, 목숨을 건 독립운동과 한 때는 공산주의 열렬한 활동가/조직가로서 코민테른의 유력한 실력가, 초대 제헌의회 의원과 농림부장관을 역임했고 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승만의 극심한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216만표라는 엄청난 득표를 보였던 죽산의 파란만장했던 삶은 이렇게 반세기 동안 억울한 누명을 덮어 쓴 채, 공산주의자, 간첩, 반동 등의 이름으로 연좌제와 더불어 그 자식들의 삶은 더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한 개인의 훌륭한 삶과 그 치열했던 시간들을 읽고 있자니 적지않은 감동을 느끼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평전을 읽으며 죽산에 대한 흠모의 정은 크게 와닿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개인의 가치관과 상황에 대한 판단은 당연히 개인의 몫이며 그의 기회주의적인 모습과 사상의 전향 등에 대해 지금에 와서 비난하거나 욕하고 싶지는 않다. 또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죽산은 독립운동 시기와 해방정국 하에서 대부분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그러했듯이 공산주의 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의 변혁을 추구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공산주의와 분명한 선을 그으며 사민주의를 추구한다. 책 속에는 스탈린의 비민주적 독재체제와 반대파 숙청 등을 지켜보며 회의를 느꼈다고는 하지만, 과연 그러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기며, 해방 직전 6년여 기간의 혹독한 신의주 감옥 생활을 지내며 그 심한 고문으로 인해 손가락 7개가 잘려나가는 고통까지 견디며 지켜낸 그의 양심과 사상이 출옥후에는 인천에 기거하며 생업에 종사하고 소시민적 생활을 행한 것에 대해서도 역시 많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물론 그가 인천에서 그저 아무일을 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인천치안유지대와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조직, 민족주의민족전선 인천지부 의장도 맡기도 했지만, 이러한 활동은 그의 비중으로 보아 해방공간에 영향력을 끼칠만한 역할을 행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며 이는 여전히 많은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평전을 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이 시기, 죽산의 독립운동 휴지기 5년여 기간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평전을 읽으며 또 하나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던 부분은 바로 현 정권과 현재의 정치권의 모습이었다. 죽산이 활동하던 그 시기 역시 반 이승만을 위해서 범 야권이 통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고, 현재의 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죽산은 그 공간에서도 과히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던 듯 하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전향자, 배신자라는 딱지를, 민주당 등 보수야당에서는 여전히 공산주의의 딱지를 그에게 붙였다. 죽산 스스로 선택한 사민주의의 노선, 명확히 선을 그었던 공산주의 이념으로 부터 여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고 정치권의 선전도구로 끝끝내 이중적 딱지붙임을 강요받게 되었던 것이다.
어찌되었건 죽산은 진보당이라는 혁신정당을 내세우고 많은 인민의 표를 거두어 들인 우리 나라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일구어낸 사람이다. 비록 '평화통일'을 주장한 것이 죄가 되는 아주 웃기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얼토당토 않은 이유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으나 그가 살아온 치열한 삶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경외로움을 느끼게 만든다. 또한, 죽음을 눈 앞에 두고서 의연했던 그의 마지막 유언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1959년 7월 31일, 그가 사형 선고를 받은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간에 형 집행을 당하기 직전 남긴 유언을 끝으로 두서없이 장황하기만 한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더불어, 다시는 이러한 창피하고 부끄러운 정치공학에 의한 인간의 목숨이 좌지우지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되지 않기를 빌며, 또한 그가 뿌린 씨가 50여 년이 흐른 지금 반드시 달콤한 열매로 맺어지기를 빌며....
“결국엔 어느 땐가 평화통일을 할 날이 올 것이고 바라고 바라던 밝은 정치와 온 국민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네. 씨를 부린 자가 거둔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씨를 뿌려놓고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