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의 새콤 달콤한 과즙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소설집이다. 아마도 그녀는 화가 아주 많이 난 모양이다. 8편의 단편 모두 온통 음울하고 침울하며 불안하고 불편하다. 또한 어김없이 피를 부르고 살인을 행하며 한없이 파괴적이고 폭력과 광기를 동반한다. 첫번째 단편 <영이>에서 영이의 어머니는 술먹고 폭행하는 아버지를 개 패듯이 삽으로 패고 결국 아버지는 개로 변하며, <과학자>에서 '나'는 거식증에 걸린 친구 한나에게 고추장을 함께 먹지 않는 다는 이유로 폭행을 가하며 그녀의 온몸에 고추장을 마구 발라 버린다. <이나의 좁고 긴방>에서는 길거리에서 도움을 청하는 할머니를 목졸라 죽여버리고 시체를 힘겹게 구겨 상자속에 넣어버린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에서도 멀쩡한 회사에 다니는 엘리트 사원인 '나'는 여전히 아무 이유없이 국밥집 할머니와 어린 아이를 살해한다. 그리고는 다들 커다란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그보다는 항상 답답하고 무엇엔가 짓눌려 있는 듯한 내 자신의 상태를, 내 하루 하루를 한없이 더 무기력하고 괴롭게 느끼는 것 같다.
처음 이 책을 읽으며 김사과라는 작가의 문체와 독특한 내용 전개에 많은 호감을 느꼈고, 동시에 저절로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그 궁금함을 해소시키기는 커녕 더더욱 물음표가 많아진 게 사실이다. 드디어 소설이 끝나고 뒷장에 문학평론가 김영찬이 극찬한 <앙팡 스키조>라는 제목의 해설 속에는 (물론, 무식한 내가 문제겠지만...) '분노의 파토스'니, '텍스트 스키조'니, '이질생성'이니 하는 잘 알아먹지도 못할 단어들의 나열로 가뜩이나 난해한 소설을 더 난해하게 분석해 놓았기에 읽는 나는 한층 더 짜증이 났다.
그 짜증을 느끼며 문득 들었던 생각 하나는, 20대 초반에 문단에 등단하고 20대 후반이 된 젊은 작가 김사과는 과연 저 평론가의 분석대로 정말 그간 한국문학에서 억압되어 왔던 '분노 자본'의 폭력적 귀환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을까? 정말로 '정상성의 외관에 감추어진 한국사회 시스템의 억압성과 폭력성'(참, 말도 어렵게 잘쓴다)을 자신의 글속에 나타내려 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작가가 그의 소설 속에 나타내려 했던 그 무엇이 평론가의 평대로였건 그렇지 않았건, 사실 그건 내게 그리 중요치 않다. 소설을 읽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것(그 어떤 것이라 할 지라도...), 그것은 철저히 나를 포함한 독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이 그토록 그녀를 화나게 했을까? 무엇이 그토록 그녀를 공포심에 떨게 했을까? 그녀의 짧다면 짧은 이십 몇년의 삶은 어떠한 경험이었을까?
읽는 내내 의문이 들었다. 현재의 이 사회가 누구에게는 한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공간일 수 있는 반면, 어떤 이에게는 숨막히고 가슴 답답하며 피곤한 공간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하는 유심론적 관점으로 바라볼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 현실 속에서의 문제이며, 적어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결코 녹록치 못한 삶의 연속일 것이라 판단함 있어 누구도 커다란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미 불편함을 넘어서 조금이라도 바둥거리지 않으면 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환경은 어린 아이에서 부터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동일하게 펼쳐진, 때문에 힘들지만 반드시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만 나의 현재를 유지할 수 있는 현실의 체제 속에, 역시 그래서인지 몇 년 전 여의도 광장에서 아무 이유없이 자동차를 돌진하며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그 사건도 김사과의 소설 속 주인공들과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불평, 분노는 광기어린 폭력과 파괴로 복수되어 지는데, 이 또한 그 대상이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에게 향하지 않으며 아무 관련도 없을 것 같은 주변의 누군가에게, 혹은 우연찮게 그 시각 그 시점에 곁에 있던 누군가에게 행해지고 만다. 책을 읽으며 느끼는 섬뜩함이란 바로 이렇게 출발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 이유없이, 영문도 모른 채 목조여 죽어가야만 하는 할머니, 역시 이유없이 갑자기 맥주병에 머리를 맞아만 하는 어린 아이...아니, 제대로 맞아 죽어야 하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라면 카타르시스라도 느낄 수 있지만 김사과는 그러한 해소를 느낄 기회를 독자들에게 주지 않는다. 그저 가슴 쓰리게, 더 불편한 감정에 휩싸이도록 만듬으로 인해 어쩌면 현실의 문제의식(언제나 불안하고 항상 경쟁해야 하며, 소위 평균 이상이 되었을지라도 여전히 미래가 불투명한...)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아서(더구나 문학에는 아는 것이 전무하여) 요즘 문단에 등장하는 작가들의 모습이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김사과는 최근에 주목받는 젊은 작가라고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내가 처음 기대하고 관심이 증폭했던 것 만큼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평론가의 해설속에 나타나는 마구 마구 분석하면서 나열하는 더 난해한 글들 때문에 내 책읽기의 반감이 더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 특히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감정은 설사 각양각색의 의견이 난무할지라도 전적으로 독자들의 것이어야 하며 역시 전적으로 그것들이 맞다고 생각한다. 어떤 규정된 무엇인가에 틀을 짜내고 그 안에서 사고하려 하는 것은 소설이 선물해 주는 독자의 상상력을 떨어뜨리게 된다. 아,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인지 모르겠다. 너무 오랜만에 리뷰를 써서 그런가? 아무튼~
여기서 나는 소주를 한잔 마셨으면 좋겠다. 그것도 커다란 머그잔으로 단숨에 마시면 좋겠다. 하지만 내게는 미지의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계속 쓰겠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쓰겠다. 다 쓴 다음에 나는 울겠다. 왜냐하면 팔이 아프니까. 다 쓴 다음에 나는 팔이 아프겠다. 왜냐하면 울고 싶으니까.
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 놈들은 다 죽여버리겠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고 있으니까. <p.23>
<영이>에 나오는 글귀이다. 김사과는 영이의 식탁의 모습을 묘사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아마도 또 다시 긴장감이 감도는 엄마와 아빠와의 싸움을 예측하는 불길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가 말하고 있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 놈들은 다 죽여버린다!
이야기를 듣지 않는 놈들이 죽어줘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