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떤 투쟁 현장엔 사람이 모이고 어떤 현장은 그렇지 않을까? 노동운동가 김혜진은 그에 관해 조심스러우면서도 예리한 견해를 낸 적이 있다. '동정의 대상이 되는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태 전 많은 사람이 연대한 홍대 청소노동자들 경우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많은 사람에게 동정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반면에 정규직화 싸움을 벌이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경우엔 생각보다 연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뿐더러 '귀족노동자가 되려한다'는 식의 반감도 보인다. ‘현대자동차 정규직이 된다’는 건 많은 사람에게 동정이 아니라 ‘신분상승’으로 여겨진다.
동정심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면 그건 연대가 아니라 적선일 것이다. 이런 현상이 생긴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주요한 이유는 한국에 노동계급의 자긍심이 형성된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전태일 이후 민주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노동자는 언제나 빼앗기고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이었다. 유럽 노동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본가보다 부유하진 않지만 자본가보다 더 정직하고 떳떳하게 살아간다는 노동계급의 자긍심은 형성되지 않았다. 결국 노동운동의 성패는 임금 인상에 집중되고 노동해방은 '자본가 못지않게 살아보는 것'이 되었다. 민주노동운동의 구심인 민주노총이 대기업과 공공부분 정규직의 이해를 위주로 하게 된 건 그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연대가 아니라 적선, 질시의 태도가 만연한 것 역시 그에 조응한 현상일 뿐이다.
싸우는 노동자들은 과연 동정의 대상이거나 질시의 대상일까. 오히려 미안하고 고마워해야 할 사람들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은 물론 우리 삶과 우리 아이의 미래를 위해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기면 내 삶도 그만큼 진전하며 그들이 밀리면 결국 내 삶도 곧 밀리게 된다. 내가 안정적인 정규직이니 그 싸움이 무관해 보인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비정규직이 많아지고 노동 현실이 나빠지면 전체 노동의 교섭력이 약해지고 결국 나도 정리해고의 칼날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전문직이라 자부한다 해도 다를 건 없다. 또한 비정규직이 많아진다는 건 연령이 낮을수록 비정규직 비율이 높아지는 것이기도 하니 내 아이는 십중팔구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게 된다. 나 역시 다행히 정년을 다 마친다 해도 여유롭게 노년을 보내는 게 아니라 더는 일할 수 없을 때까지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게 된다. 사실 이 모든 게 노동자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쪼개서 무력화하려는 자본의 ‘분리지배 전략’이기에 상위 1%가 아니라면 이 구조에서 예외가 될 사람은 없다.
우리는 일제에 대항하여 싸우느라 풍찬노숙하며 다치고 죽어간 독립운동가들을 '불쌍한 사람들'이라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 모두를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싸우는 노동자들 역시 우리가 미안하고 고마워해야 할, 존경해야 할 사람들이다. 심지어 재능교육 해고노동자들처럼 제 문제만 생각하면 타결 기회가 있었음에도 특수고용직 노동자 전체의 현실을 위해 이기기 어려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경우는 '우리 시대의 의인'이라 상찬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몇 해 전에 철수한 프랑스 기업 까르푸 경영진이 싸우는 노동자들에게 보인 야만적인 행태를 기억할 것이다. 그들이 프랑스에서는 상상도 못할 행동을 한국에서 한 이유가 무엇일까. 톨레랑스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프랑스 안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일까? 자본의 이윤추구와 무한증식 욕망은 어디든 다르지 않다. 다른 건 프랑스 노동자들은 연대하지만 한국 노동자들은 연대하지 않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온 나라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났을 테지만, 한국에선 남의 일처럼 외면하거나 연대가 아닌 적선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발레오전장, 파카한일유압, 포레시아, 보워터코리아, 보쉬전장, 컨티넨탈, 3M 등 근래 몇 년 새 외국 투자기업들이 싸우는 노동자에게 보이는 야만적 행태는 우리에게 연대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해준다.
마침, 제대로 된 연대를 실행해볼 기회가 있다. 24일 오후 4시 서울역 광장에서 ‘쌍용차 범국민대회’가 열리는데, 만 명의 조직위원을 모은다. 권위주의 문화에 익숙하다면 만 명이나 되는 조직위원이 무슨 놈의 조직위원인가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 명의 조직위원은 우리 모두가 조직위원이라는, 이 싸움이 더는 남의 일이 아니며 동정의 대상도 질시의 대상도 아닌 내 문제라는 사실을 상징한다. 당신이 생산직이든 사무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노동자라면, 혹은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만 명 중 한 사람이 되시길. 그래서 적선의 세상을 연대의 세상으로 바꾸는 초석이 되시길. 만 명의 조직위원, 멋지지 않은가?
쌍용차 범국민대회 조직위원이 되려는 분은 이메일로 이름을 보내고 5천원의 회비를 송금하면 된다. syoua@hanmail.net 신한은행 110-379-649850 김정우
(경향신문 '혁명은 안단테로')
*출처 : 규항.넷
http://gyuhang.net/2787?TSSESSIONgyuhangnet=4fbe880e34a83c541030c18e3c65c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