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1989년에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소련이 붕괴하던 1991년에는 4학년. 아버지가 경상도 출신에다 할아버지 대부터 가족들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조선일보’를 열심히 구독하는 집안에서 자란 나는, 대학생이 될 때까지 ‘사회주의’ ‘학생운동’ 등에 대한 개념 확립이 전혀 돼 있지 않았다. 우리 선배들은 대체 왜 그토록 ‘오래된 정원’을 찾아내려 젊음을 바쳤을까. 사회주의의 내부모순과 몰락이 백일하에 드러난 지금 우리는 왜 여전히 그 정원을 찾으려 할까.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건 나이 한 스물 서넛쯤 된 후였다.
‘오래된 정원’은 ‘광장’의 저자 최인훈이 쓴 장편소설 ‘화두’와 많이 닮았다. 인류의 이상향은 사회주의의 온전한 실현을 통해서만 건설 가능하다고 믿는 두 작가가 사회주의의 붕괴를 바라보며 착잡함을 씹는다는 점에서, 황석영과 최인훈은 근본적으로 같은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그 이상향이 황석영의 ‘오현우’에게는 갈뫼의 작고 아담한 ‘정원’이었고, 최인훈의 ‘나’에게는 ‘트로이의 영광’이었던 것이다.
황석영은 이 책 후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새로운 세기에 지난 세기의 암울한 고통과 상실과 좌절을 되새기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아직도 희망은 있는 것일까?”
아직도 희망은 있을까. 모르겠다. 이젠 당신들이 꿈꾸었던 그 ‘정원’이 희망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찾기도 어렵다. 당신들은 혁명을 일으켜 정원을 가꾸고자 했지만, 지금은 사회변혁을 위해 혁명이라는 수단이 적절하다고 믿는 이들도 없다. 혁명은 이제 당신들의 추억일 뿐이다.
그러나 계속 살아가야 할 우리는 추억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당신들이 겪은 고통과 상실과 좌절은 이제 유려한 언어로 기록되어 ‘추억’이라는 포장지에 싸인 채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 하지만 당신들이 가꾸다 만 그 정원을 계속해서 가꿔나가야 할 우리는 추억이 아니라 길잡이가 필요하다. 당신들이 남긴 말 중 아직도 우리가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건 이 한 마디인 것 같다.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오래 걸리는 건 상관없다. 열매가 맺힌다는 확신만 있다면, 언제까지든 물과 거름을 줄 힘이 있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