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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과 매너리즘 사이의 줄타기
destineee
200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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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임밸류(namevalue)의 힘은 무섭다. 일단 소비자의 뇌리에 각인되는 데 성공만 하면 그 이후에는 탄탄대로다. ''삼성 휴대폰'' ''현대차'' 등으로 정착된 브랜드 가치는 시장점유율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 엄청난 기여를 한다. 그래서 요즘은 기업들이 제품의 질 못잖게 브랜드 마케팅에도 상당한 신경을 쓴다.
음반시장에서 ''이수영''이라는 브랜드는 이제 성공의 보증수표로 굳게 자리잡은 듯하다. 엊그제 TV를 보다가 이수영 7집 ''Grace'' 광고가 나오는 걸 보곤 적잖이 놀랐다. 웬만큼 성공을 자신하지 않고는 TV광고를 때리지 않는 게 음반시장의 생리인데 말이다. 2000년, 20대 초반의 앳된 소녀티를 팍팍 풍기며 1집 ''I Believe''로 데뷔한 이수영은, 이제 침체돼가는 한국 음반시장의 구원투수로 인정받을 만큼 컸다.
나도 그녀의 팬이었다. 4집 ''라라라''까지는 돈 주고 음반을 샀다. 이등병 시절엔 고참들이 왼종일 틀어놓던 짬뽕 최신가요 테이프에서 ''Never again''을 들으며 마음을 달랬고, 상병 달 즈음에는 주말 TV 가요프로에 어김없이 등장하던 ''그리고 사랑해''를, 병장이 돼서는 내무반에 다리 쭉 뻗고 누워서는 워크맨으로 ''라라라''를 들으며 군생활을 보냈다.
그녀가 없었다면 군생활이 꽤나 심심했을 게다. 사실은 장문의 팬레터도 보낸 적이 있다. 물론 답은 못 받았지만. 그래도 당시 그녀가 진행하던 ''감성시대''라는 라디오 프로에서, 내가 편지에 적어놨던 내용과 좀 비슷한 얘기를 그녀가 ''잠시'' 하던 걸 듣고 혼자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제대 후에는 그녀의 앨범을 사지 않았다. 일단 돈이 좀 궁했다. 복학해서 자취를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5집부터는 웬지 그녀의 음악이 다소 매너리즘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노래가 그거 같고, 노랫말도 그게 그거고. 물론 스타일을 확 바꾸라는 얘긴 아니었지만, 좀 식상했다. 그래서 6집까지는 안 샀다.
7집이 나왔다. 모처럼 앨범을 샀다. 역시 스타일이 별로 바뀌지 않았다. 뭐, 가수가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계속 발전시킬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녀 자신도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보컬 스타일의 변화를 시도하려 했단다. 그런데 자신의 스타일을 더 발전시키는 게 나을 거라는 말을 트레이너에게 들었다고 한다. 글쎄, 이 앨범을 세 번 정도 들었다. 분명 감정 처리는 훨씬 섬세해진 것 같다. 전 곡의 노랫말을 직접 썼으니 감정이입이 훨씬 쉬웠을 것임에는 분명하다. 바이브레이션도 전보다 더 안정돼서 그야말로 듣는 이를 때로는 ''간드러지게'' 때로는 ''가슴 아리게'' 한다. 좋다.
그러나 내가 전부터 그녀에게 아쉬웠던 몇 가지는 아직도 별로 개선되지 않은 듯하다. 첫째로 발음 문제. 발라드임에도 불구하고 노랫말의 의미전달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건 전부터 그랬다. 가사를 뭉개는 건 분명 아닌데, 비음 섞인 가성을 쓰는 부분에서 이런 현상이 주로 일어난다. 신경써야 할 부분이다.
둘째도 가사 문제. 일단 타이틀곡 ''Grace''는 참 잘 쓴 가사라고 생각한다.
''정상에 올라 너의 이름 토한 날 / 나를 누르던 앙금같은 기억도 / 숨을 몰아서 한껏 뱉어낸 오늘 / 너를 잊기 좋은 날''
참 좋다. 표현도 맛깔스럽고. 근데 나머지 가사들은 좀 그렇다. 개중에는 멜로디는 너무 좋은데 가사가 너무 진부해서 전체적으로 실망스러운 노래들도 몇 있다. ''시린'' ''정말 다 잊을 줄 알았는데'' 같은 노래들은 노랫말 때문에 멜로디가 죽는 대표적인 경우다.
물론 앨범의 콘셉트를 가수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을 터다. 기획사의 방향도 웬만큼 맞춰 줘야 할 테니 말이다. 그래도 이수영 정도 되는 위치라면, 음악 스타일까지는 아니더라도 노랫말쯤은 슬슬 변화를 주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허구헌날 청승맞은 사랑타령만 불러대는 게 본인도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솔직히 이번 앨범은 그래도 사랑타령이 좀 차분해지고 성숙해진 느낌이 든다. 그건 좋다. 하지만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이야기, 자신이 바라보는 이 세상, 사회 등에 대한 이야기도 좀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정치성을 띠라는 얘기가 아니다. 20대 후반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 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꼭 사랑타령에 한정돼야 하느냐는 말이다.
난 아직도 이수영이 좋다. 가수로서 보여주는 성실함도 좋고, 실력도 충분하고, 언론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개인적인 모습도 좋다. 그래서 그녀는 정말 ''많이 컸다''. 보기 좋다. 이번 앨범을 내면서도 더 큰 것 같다. 변화가 느껴진다. 하지만 팬의 입장에서 아쉬움이 아주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녀가 좀 더 크기를, 그리고 좀 더 많은 것들을 보고 우리에게 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몇 자 적었다.
추천곡은 ''Grace''와 ''이 죽일 놈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