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으로서 ‘있을 건 다’ 있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난 정운영에 대해 잘 모른다. 그가 이러이러한 사람이었다는 건 그의 사후에야 전해 들었을 뿐이다. 중앙일보로 옮긴 뒤 사람이 변했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도 사실 피부에 썩 와 닿지는 않는다. 지금 내가 정운영이라는 인물을 판단할 근거는 단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그가 마르크스경제학의 최고 전문가였다는 사실, 또 하나는 이 책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다. 한 사람의 인생을 겨우 책 한 권과 그의 전력만 갖고 재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섣부른 일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혹 나중에라도 그의 저서들을 더 접한다면 그를 보는 내 시각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과연 세간의 말대로 그는 ‘변절’한 지식인인가? 지식인의 ‘변절’과 ‘각성’을 구분하는 기준은 대체 무엇인가? 소위 ‘참된 지식인’이라는 명함을 지켜내기 위해 결코 버려서는 안될 가치란 무엇인가? 정운영이 남긴 사유의 궤적을 힘겹게 좇아가는 과정에서 내게 ‘덤으로’ 던져진 화두는 그런 것들이었다. ‘덤으로’라고 하지만 실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화두일지도 모른다. 지킬 것과 버릴 것을 취사선택하고, 얼마나 지키고 버릴지를 가늠하기. 지식인의, 아니 한 인간의 세계관과 사유는 결국 그가 ‘무엇을, 어떻게 취사선택하나’로 결정되지 않던가 말이다. 그 취사선택 방식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사람은 ‘소신이 있다’고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흔히 ‘기회주의자’라고 부르지 않던가 말이다.
그렇다면 정운영은 과연 뭘 버리고 뭘 지켰을까. 재벌신문의 일원이 된 뒤로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그의 열망이 퇴색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에 실린 그의 칼럼에는 여전히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있다. ‘사람의 부조리’를 호되게 꾸짖으면서도 여전히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다. 무작정 이상만을 부르짖는 맹목적 교조주의가 아닌 냉철한 현실 인식이 있다. 한 마디로 그의 글에는 지식인으로서 ‘있을 건 다’ 있다.
물론 ‘마르크스 전문가’라는 이름표에 주목한다면 그가 ‘변절했다’고 오해할 만한 대목들이 몇 있기는 하다. “성장을 통해서는 분배의 공정을 도모할 수 있지만, 공평한 분배로는 성장을 기약하지 못한다(p.163)”는 구절이나, 노사관계에서 노동운동계의 각성을 요구하며 “세계화니 경쟁력이니 하는 시대의 생존 원리(p.231)”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부분 등이 그렇다. 아예 대놓고 “확실히 우리 사회에는 노동 귀족과 노예가 있(p.159)”다는 말에는 이마에 핏대를 세울 이들도 꽤 있을 듯하다. 하지만 그게 어디 정운영의 잘못이던가? 따지고 보면 이는 자본주의의 놀라운 현실적응력 탓이 아니던가.
자본의 신묘함은 노동 대 자본이라는 단순한 구도에서 노동자 계급 내의 계급분화를 이끌어냈다. 세계화와 성장지상주의를 놓고 TINA(There Is No Alternative: 대안은 없다)를 외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자본주의가 무엇이던가. 마르크스에게 “기나긴 발전 과정의 산물”이라 불린 그 자본주의다. 그람시로 하여금 ‘진지전’을 제안하며 ‘일보후퇴 이보전진’을 꾀하게 만든 그 자본주의다. 정운영 쯤 되는 지식인이 자본주의의 그 같은 끈질김을 몰랐을 리 없다고 나는 믿는다. 때로 그의 글에서 ‘진보 논객’으로서의 선명성이 떨어져 보이고, 일견 작금의 지배적 흐름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가 엿보이는 이유는 그래서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얼치기 운동권 대학생도 아니고 소위 ‘마르크스 경제학의 최고 권위자’라는 사람이 남긴 글이다. 변절 운운하기에 앞서 한 번쯤 ‘왜 이렇게 썼을까’를 고민해주는 것이 고인의 위업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차라리 나는 그가 끝까지 버리지 않았던 ‘다른 세상’에 대한 믿음, 그리고 결코 빛바래지 않았던 날카로운 통찰력에 주목한다. ‘경제 교과서 좌편향(?)’ 논란을 보며 “기업이 살아야 근로자가 산다는 말이 진정으로 빛나려면, 근로자가 죽으면 기업은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p.212)”고 지적했듯 그는 여전히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너도나도 ‘좌파정부 때문에 나라가 이 꼴’이라며 입에 게거품을 물 때 “현재는 우경화 3단계 이상이고, 정권 말에는 5단계쯤 될 것(p.219)”이라 진단한 그의 시각은 놀라울 정도다(그 칼럼은 2년도 더 된 글인데!). 국내 재벌을 개혁하려다 되레 외국 거대자본에 길을 터주는 우를 범하지 말자며 “나라 위해 우리 변절합시다(p.300)”라는 ‘극단적인’ 언사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는 “남한이 북한을 돕는 것은 유세가 아니라 의무(p.266)”라는 말에 부끄러워했고, 용산기지 이전에 따른 안보불안 논란에 “안보의 최고 형태는 전쟁을 막는 것이지 우세한 전력으로 적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p.283)”라며 응수하기도 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져서 안 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유엔 결의에도 없고, 국제 협약에도 없다(p.308)”는 말에는 서늘함마저 감돈다. 그러면서도 껍데기뿐인 ‘민족공조’를 아쉬워하며 “스스로 돕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p.317)”고 북한에 주문한다.
끊임없이 실망하고, 끊임없이 비판하면서도 그가 최후까지 놓지 않았던 끈은 ‘사람이 희망’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칼럼 ‘영웅본색’ 역시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개혁을 빙자한 “인위적 패거리” 386에 실망하고 “세계화 시대에 정치적 정직성이니 정책의 공평성이니 하는 덕목들이 말짱 힘 빠진 주장임을 잘 안다(p.238)”면서도 그는 고집스럽게 외친다. 마땅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라고. 결국 최후의 희망은 인간 그 자신에게 있다는 뜻이다. 정치를 하건 개혁을 하건 그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니 말이다. 평소 ‘인간은 제도를 극복할 수 있지만, 제도는 인간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해온 나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그의 애정어린 집착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물론 모든 인간이 바뀌기를 바라느니 지구가 멸망하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정치하는 이들, 혹은 개혁을 주도한다는 이들의 정직과 청렴 정도는 기대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아니, 그런 덕목들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부패한 진보는 ‘부패했다’는 점에서 부패한 보수와 하등 다를 게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자
변절이 아니라 균형이다. 최고로 숙련된 광대만이 해낼 수 있는 고도의 줄타기다. 앞뒤 가리지 않고 한 쪽으로만 질주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내 영역’만 고수하며 ‘늘 하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어찌 보면 지식인의 특권이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할 때 과감히 할 수 있는 용기는 그 특권 위에 얹어진 의무다. 얻어맞을 줄 알면서도 뺨을 내미는 데는 적잖은 소신과 용기가 필요하다. 정운영은 “때로는 질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라던 그의 말처럼, ‘맞을 줄 알면서도 들이대는’ 용기를 지닌 지식인이었다. 그런 태도를 놓고 변절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적어도 상식적인 의미로는 그렇다.
자본주의와 마르크스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그에게, 자본주의라는 벽은 너무도 단단해 보였을 것이다. 한데 그래서 그가 자신의 이상을 버렸는가? 그렇지는 않다. 물론 변함없이 ‘새로운 세상’만을 외치는 것도 충분히 아름다운 모습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위대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만약 정운영에게 변한 점이 있다면 그런 측면에서였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인정하되 버리지는 않기. 그것은 어찌 보면 ‘아예 인정하지 않기’보다 훨씬 어렵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 편히 훨씬 현실적이고, 그러므로 이성적이다. ‘더디 가기’는 성장지상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에만 필요한 말은 아니다. 개혁도, 진보도, 새로운 세상 만들기에도 ‘더디 가기’는 필요하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도보여행을 했다던 한 선배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발걸음을 늦추니 더 많은 것들이 보이더라.” ‘더디 가기’의 미덕이다. 하지만 걸음을 늦춘다고 해서 목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목표를 잊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제목에 한 단어를 추가하고 싶다.
“‘그래도’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