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책 이야기

 

 

고등학교 일반사회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경제학자 맬서스에 대해 처음 들어본 게 아마 그때였던 듯싶다.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 보고서와 함께 맬서스의 <인구론>이 소개된 부분이었다. 내용인즉 식량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 비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결국 식량 생산량이 인구증가를 따라가지 못해 기아가 닥친다, 대략 그랬다.

 

한데 이 국정교과서라는 놈이 참 고약하다. <인구론>에 실린 맬서스의 자연도태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더란 말이다. 그걸 알게 된 건 대학교에 입학하고도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거지같은 한국 교과서, 학생들 무뇌충 만들기 딱 좋다. 교과서에 안 나오면 선생님이라도 가르쳐 줘야 하지 않나. 그런 얘기를 해주는 선생도 하나 없더라.

 

어쨌든 맬서스의 이론이 틀렸음은 벌써 오래 전에 증명됐다. 식량생산력이 높아진 덕분이다. 하면 물질적 결핍이 사라졌으니 기아도 사라졌을까? 불행하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도 8억이 넘는 인구가 질병과 배고픔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 기아인구의 대부분이 중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에 집중돼 있다. 아프리카의 상황은 특히나 심각하다. 2000년 기준으로 아프리카 인구는 세계인구의 15퍼센트도 안 된다. 그런데 총 기아인구에서 아프리카가 차지하는 비율은 무려 25퍼센트다. 어림잡아 계산하면 전체 아프리카 인구의 약 4분의 1이 기아상태에 놓여 있다는 얘기다.

 

 

신자유주의 - the root of all evil

 

기술이 발달해서 식량 생산은 훨씬 늘었다는데 어째서 이런 비극이 계속되는 걸까. 아프리카인들이 특별히 열등해서? 아니면 신의 노여움을 사서? (옛날에 교회에서 들은 얘긴데, 노아의 세 아들 중 어떤 녀석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신의 노여움을 샀단다. 그는 저주를 받았고, 그의 후손들에겐 자자손손 죽도록 고생할 운명이 지워졌단다. 그게 아프리카 흑인들이란다. 허 참.) 그런 얼토당토 않은 자연도태설을 신봉하는 지식인들이 아직도 있단다. 소가 웃을 일이지만, '죽어도 걔들이 죽지 내가 죽냐'고 생각하는 인간들이라면 그런 생각을 가질 법도 하다. 맬서스 목사님이 설파한 그 고매한 자연도태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건재하다. '시장원리주의'라는 마법의 망토를 걸친 덕분이다.

 

지구 한쪽에서는 식량이 남아돌아 내다 버리거나 가축의 먹이로 쓴다. 다른 쪽에서는 먹을 게 없어 사람이 굶어죽는다. 이는 구조적인 문제라고밖에 볼 도리가 없다. 기아문제 해결에 나설 여력이 되는 강대국들도 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같은 불편한 진실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자신들의 이윤추구욕임을 그들은 결코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대신 그 구조를 정당화할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다. 시장원리주의다. 굶어죽는 이들이 인종적으로 딱히 열등하지는 않다고? 그래서 어쩌라고? 시장에서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하다 보니 그런 일이 생기는데. 시장은 완전무결하니까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단 말야. 이렇게 강대국과 다국적기업은 그 불편한 진실이 가져다주는 양심의 가책을 훌훌 털어버린다.

 

시장원리는 자연법칙, 혹은 신의 섭리와 동등한 위치를 획득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맹신은 이 시대를 지배하는 유일한 신앙이다. 그 안에는 인간도 없고 동정심도 없으며 눈물도 없다.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잠비아 국민들이 만성적인 기아에 시달리는 동안에도 투기꾼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옥수수를 저장탑(사일로)에 쌓아둔다. 옥수수의 국제거래가격을 최대한 올리기 위해서다. 굶는다고? 원조해주면 되잖아? 식으로 기아문제가 간단히 해결될 수 없는 이유는 그래서다. 국제기구나 인도적 지원단체들도 구호용 곡물을 투기자본으로부터 사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쌀이 비싸다구? 그럼 브로콜리 퍼먹어!

 

대학교 1학년 때였나. 교수가 희한한 과제를 냈었다.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해보고 수업시간에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뭘 할까 고민하다가, 24시간 동안 굶어보기로 했다. 거짓말 안 보태고 딱 24시간 동안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한 나절 정도는 견딜 만하더니만, 18시간쯤 되니까 펜을 쥔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책을 펴놓긴 했는데 글자가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아프리카 어린이가 스쳐갔다. 삼풍백화점 붕괴현장에서 며칠 동안 밥도, 물도 없이 살아남았다는 여학생이 떠올랐다. 나름대로 실행해 본 '기아체험 24시간'에서 내가 얻은 건 의외로 많았다.

 

기아는 상당히 원초적인 측면의 문제다. 그러면서도 그 원인은 무척이나 중층적이다. 거대자본의 횡포 말고도 내전이나 독재와 같은 정치적 요인, 기후변화와 같은 환경적 요인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저자의 타격점은 분명 신자유주의에 맞춰져 있다. 도울 여력이 있는데도 도울 수 없게 만드는 체제라는 점에서다. 식량이 남아도는데도 돈이 없어 굶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식량을 파는 이들이 소위 밥줄을 틀어쥐고 놓지 않는다는 얘기다. 시쳇말로 먹는 거 갖고 장난치는 이들이 있다는 소리다. 이건 분명 부조리다. 그 부조리를 정당한 이윤 추구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체제가 신자유주의, 즉 시장원리주의다.

 

책을 덮고 잠시 생각을 했다. 우루과이 라운드가 떠오르고, WTO가 떠오르고, 한-미 FTA가 떠올랐다. 농업을 개방한들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나, 싶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털어버린다. 쌀 농가가 몰락하고 난 다음엔 주식으로 뭘 먹으려나. 브로콜리나 퍼먹어야 하나? 어차피 우리나라에 쌀이며 쇠고기며 수출하는 것도 미국의 거대'기업'일 터, 그들의 이윤추구욕이 선한 쪽으로 발현되기만을 무작정 기대해야 하는 건가? 자급자족 경제를 스스로 이룩하는 것만이 기아문제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길이라는 저자의 지적을 무심히 넘기기엔, 나는 쌀밥을 너무 좋아한다.

 

며칠 전에도 신문에 수단 다르푸르 이야기가 실렸다. 다르푸르를 보호하라며 세계 각국이 뒤늦게나마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단다. 결코 정치성을 탈피하지 못한 듯 보이는 이 움직임을 과연 연대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떡하겠는가. 저자의 말마따나 결국 사람이 희망’이고 사람이 바뀌어야 하는 일인데. 내가 이 책을 읽는다고, 외신기자들이 신문에 다르푸르 이야기를 쓴다고 해서 세상이 즉각 변하겠는가. 내 독서나 기자들의 보도는 그저  '사람을 바꿔야 세상이 바뀐다'는 의식의 실천일 뿐이다. 하지만 그 작은 실천들이, 미래에 실현될지도 모를 어떤 연대의 씨앗을 품고 있으리라는 희망. 그것을 버리지 않을 뿐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 (한국어판 서문 中)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YBLOGWE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