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주인공인 로지나는 이렇게 말한다. “아빠, 세상에 불법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내가 태어나면 합법 사람입니까 불법 사람입니까, 물어보고 태어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요.” 여기의 세상에는 한국의 법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한국에서는 태어난 자체로 축복받는 사람이 있는 한편 태어난 자체로 불법으로 단속받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일은 아니겠지만 책의 공간이 한국이기에 한국에 한정해서 서술하겠다.
한국의 이민자에 관한 법과 세계인권선언 중 어느 것이 효력이 더 강할까? 아무래도 전자가 아니겠는가? 그러하니 로지나와 같이 불법 체류 단속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생기니 말이다. 불법 체류라는 말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다. 그 이전에는 어느 곳을 가도, 국경을 마음대로 넘나들어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국민국가-민족국가-가 형성되고 국민의 이익(Nation Interest)이 중시되면서 불법 체류라는 단어가 생겼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희는 사람이기 이전에 한국의 국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민이 사람(인간)에 선행하는 역설적인 사회가 현대의 사회이다.
한국은 여전히 배타적인 사회이다. 소설을 떠나서 지난 제주도 예멘 난민 사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제주도에 온 난민들이 예멘 출신이 아니라 미국 출신이었어도 사람들은 같은 반응을 보였을까? 인종은 단지 인간이 눈에 보이는 대로 구분해 놓은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지 오래인데 아직까지 한국엔 인종주의가 남아있다.
세계에서 테러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한국에 있는 무슬림은 의심받고 비난받는다. “무엇이라 불리든, 사람들 눈에 우리는 테러리스트와 동급이었다.” 최근에 이런 말이 있다. 모든 무슬림이 테러리스트는 아니지만, 모든 테러리스트는 무슬림이라는 말. 우리는 이슬람하면 보통 테러를 떠올린다. 이슬람의 교리를 조금이라도 공부하면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
역사학도로서 중세의 십자군 전쟁을 기억해보자.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가 아니었던가? 단지 성지를 회복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다. 기독교 역시 피로 얼룩진 종교이다. 이슬람교와 다를 게 하나 없다. 기독교에는 극우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가? 그들 역시 피를 보게 만든 행동을 저질렀다. 이슬람교 역시 극우 세력이 테러를 행할 뿐이다. 대다수의 무슬림은 그렇지 않다. 왜 내전이 일어나 많은 무슬림이 자국을 탈출했겠는가? 극우 무슬림의 이론에 동조한다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을까?
한국 사회는 차별적인 시선으로 모든 무슬림을 교조주의 무슬림으로 생각한다. 백인이 여전히 한국인들을 차별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한국인이 무슬림을 차별하면 당연한 행동이라고 치부한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책이 마지막 부분에 로지나가 동생 라주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한국 사회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못 하는 일 앞으로도 쌔고 쌨어. 그렇게 하나하나 상처받으면 너 못 살아.” 하지 못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이것은 과거 우리가 받았던 차별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와 ‘그들’은 인종, 종교, 국민으로 구분되기 이전에 인간이다.
세계인권선언의 일부 조항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제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제2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으며, 이 선언에 나와 있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제6조, 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
제7조,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며, 차별 없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세계인권선언 앞에 떳떳할 수 있는가?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