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도서]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저/라이너 풍크 편/장혜경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사랑하고 있을까. 이 책은 에리히 프롬이 '삶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쓴, 미발표 유작을 그의 조교 라이너 풍크 박사가 엮어 낸 것이다. 책 전반에 프롬의 사상이 잘 드러나는데, 특히 그의 수작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소유냐 존재냐>에서 피력한 주장이 책 전반을 관통하며 삶에 대한 통찰을 제시한다. (사실 이점에서 두 저작의 리뷰를 먼저 써야 하는 것이 옳긴 하다)

 

"삶은 본질적으로 성장의 과정이며 온전해지는 과정이므로 통제와 폭력의 수단으로는 사랑할 수 없으며, 삶에 대한 사랑은 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사랑의 핵심이다." 우린 삶을 사랑해야 다른 것들을 사랑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살아있는 것에 대한 사랑과 죽어있는 것에 대한 사랑 즉, 바이오필리아적 사랑네크로필리아적 사랑을 대조한다. 그는 사랑은 살아있는 것을 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대의 인간은 물건과 같은 죽어있는 것들을 소비하고 사랑하며 과정보다 결과에 더 관심을 쏟고 그에 따라 불안을 겪게 된다.

 

"사랑은 행동, 소유, 사용이 아니라 존재에 만족하는 능력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다. 고통은 인생의 최악이 아니다. 최악은 무관심이다."

 

프롬은 수동성을 걱정하지만 또 그를 넘어서 무엇도 느끼거나 사유하지 못하는 상태를 걱정했다. 프롬의 주장은 타인과의 사랑,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스스로에게 향해있는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통제나 폭력은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물리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소비로 스스로의 존재를 채우는 것, 자신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결정 내리는 것도 포함했을 것이다.

 

프롬이 말하는 타인은 곧 자신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가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결국 자신에 대한 태도에 기초한다. 그렇기에 탐욕적이고 자신을 미워하는 이기심, 나르시시즘은 자기애와 다른 것이다. 또한 타인에 대한 사랑과 자기애는 많은 철학자들이 비판한 나약한 것이 결코 아니다. "나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인간 연대란 없다", "자신에게 향하는 감정과 타인에게 향하는 감정을 원칙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

 

프롬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무엇이 최선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사랑은 이해하고 설득하며 생명력을 불어넣으려 애쓴다." 우린 자신 내면의 말을 듣고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을까. 우린 대상을 진정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쇼펜하우어나 불교의 사상과도 어느 정도 맞닿아있다. 뒤로 빠져나와 대상을 좀 더 명확하게 바라보는 것. 또 인간 삶만의 의미를 찾는 것.

 

에리히 프롬이 보기에 죽어있는 것들을 소비하며 스스로를 채우는 인간은 죽어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삶 자체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 그리고 당신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다. 사랑하는 대상은 살아있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사랑의 방식에도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하다. "사랑은 '격정'이 아니라 자기 '대상'의 행복과 발전, 자유를 위해 매진하는 능동적 노력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우리가 흔히 '불타오르는 사랑'이라고 말하는 참을 수 없는 감정적인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이 사랑은 타인을 포함해 나 자신에게도 향해있다.

 

소유는 상실을 내포한다. 그러기에 소유는 불안한 존재방식일 수밖에 없다. 그의 주장을 읽다 보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 이해된다. 역사의 발전에서 경제구조에 사상까지 얽매인 현대인의 무의식을 말한다. 현대 경제구조에서 심리적으로도 소외받는 개인의 무력감을 인지하고 스스로의 삶을 사랑할 수 있도록 활동성을 일깨우잔 말이다.

 

현대인들은 소비에서 자유와 행복을 느끼지만 이는 가짜 자유와 가짜 행복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수동적이고 종속적이게 된다. 이런 인간은 내면 활동성의 결핍을 분주함으로 채운다. 붕 떠버린 존재를 분주함으로 메꾸는 것이다. 휴식조차 수동적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못 견뎌하는 인간을 누군가 비판했듯이.

 

결국 에리히 프롬은 살아있는 것과 기계적인 것의 대립을 통해 현대의 변해버린 사랑을 지적하고 자신의 올바른 활동성을 키워 타인까지 사랑하길 소망하고 있다. 기쁨은 소비 생활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살아있는 것과의 교감이다. 죽어있는 것과의 교감은 비판의식 없는 무조건적인 순응과 전체주의를 만들었고, 현대 인간의 소외감과 무력감을 낳았다.

 

우리 안에는 무엇인가 살아있는가?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시계의 톱니바퀴는 행복하다. 아니 행복조차 모른다.

사유할 틈이 없이 삶에 대해 무감각해졌기 때문이다.

이 무감각을 소비로 채우며 존재한다.

 

프롬은 한 번 가만히, 천천히 멈춰 서서 우리 삶의 수동성을 인식해 보라고 말한다.

"우리가 생존하려면 지금처럼 그냥 살아가서는 안된다. 제대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YBLOGWEB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