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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한채영을 닮았다. 얼굴이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와 봉긋하게 솟은 가슴의 형태가 영락없는 한채영이었다. 사촌동생이라고 해도 영락없이 믿을판이었는데 그런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을 때 내가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저, 혹시 도를 믿으시나요?"

 

21세기를 살아가는 척박한 감성의 직장인치고 길에서 말걸어 오는 도인을 피하는 방법은 아마 서너개쯤 다 챙겨두고 있겠지만 나의 대처법은 허공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듣는것 처럼 시선을 돌리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며 오로지 직진을 하는 것이다. 대개는 두세발짝쯤 쫓아오다가 또 다른 복 많은 사람을 찾기 마련이니까. 지나간 사람에게 미련을 두지 않는 것이 그네들의 특징인 걸 나도 진작에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나도 내가 속물인 걸 알고 있지만 속물이 아닌 성인군자라 하더라도 백주대낮 테헤란로 한가운데서 몸에 딱 달라붙는 느낌 좋은 스판소재의 반팔 티셔츠와 무릎위로 한참 올라온 미니스커트 밑으로 쭉뻗은 보기 좋은 다리를 가진 한채영 사촌 동생같은 여자가 도를 아시냐고 물어 온다면 그대로 지나쳐 버릴만큼 대단한 남자는 과연 몇이나 있을까?

 

"네? 뭐라고 하셨는지?"

 

분명히 들은 이야기를 재차 확인할만큼 귀가 멀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그녀의 가슴께로 향했는데 이건 길가던 부처님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시원하게 파인 티셔츠 사이로 가슴골이 보이는 장관이 그랜드 캐년에 비교할만 했다.

 

"복이 많으신 거 같은데 왠지 잘 안풀리시는 일이 있는거 같아서요."

 

눈길을 내리깔면서 수줍게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나이가 몇살이나 되었을까? 촉촉하게 발라놓은 립스틱과 도톰한 입술을 쳐다보느라 입이 약간 벌어진 걸 느끼는데는 정확하게 2초반쯤 걸렸다. 그 사이에 침을 안흘린게 다행이다.

 

"아..네. 요즘 좀 안풀리는 일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런데 왜?'

 

"아까 지하철에서 올라오시는 걸 보니까 그런 느낌이 들어서요. 제가 요즘 다니는데가 있는데 선생님같이 복이 많으신 분들께 원래의 복을 찾아드리는 그런 일을 해야 저도 복을 받는다구요. 혹시 지금 바쁘세요?"

 

거래처에 회의하러 가는 길이었지만 왠지 일의 무게가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면서 결국 뱉은 말은 이거였다.

 

"오늘은 좀 한가합니다."

 

"아, 다행이다"

 

선생님한테 칭찬이라도 들은 학생처럼 그녀가 폴짝 폴짝 뛰는통에 탐스러운 젖가슴도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박수까지 쳐가면서 뛰는 모습이 왠지 자선냄비에 천만원짜리 수표라도 넣은 것 같은 만족감을 내게 안겨주었다.

 

"시간 되시면 저랑 같이 잠깐 가셔서 좋은 말씀 한번 들어보세요."

 

"아.... 그게 말이죠. 한가하긴 한데.. 그것도 멀리 가야 하나요? 아니면 무슨 교당같은데라도??"

 

"아, 그런건 아니구요. 저희는 따로 교당이 있거나 그런게 아니고 각자가 알아서 좋은 말씀을 전하고 그냥 결과만 보고하게 되어 있어서요. 괜찮으시면 커피나 한잔 하시죠. 커피빈 어떠세요? 조기 모퉁이에 있던데"

 

사람은 예상을 벗어난 결과에는 두가지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침묵하거나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나의 경우에는 두가지 반응이 동시에 나타났다. 2초쯤 침묵하다가 10초쯤 파안대소를 했다.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낯선 여자에게 파안대소라니,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일이지만 그때는 아마 반쯤은 무섭고 반쯤은 호기심이 미친듯이 부풀어 올라서 그랬을 것이다. 어릴때부터 지나친 호기심이 내 단점중에 하나라고 수많은 친구들이 지적질을 했더랬지. 그래서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커피빈으로 향했다. 그녀의 한발자국 뒤에서 따라가는 내 콧속으로 은은하지만 무지하게 섹시한 냄새가 흘러들었다. 그녀는 향수 취향도 꽤 괜찮은 여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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