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잘 지냈어?'
오랫만에 만난 친구가 던지는 인사는 늘 친근하다. 환한 미소가 함께 어우러지면 더 그렇다. 목소리는 밝은데 얼굴엔 살짝 그늘이 있는 친구 녀석의 인사에 얼마만인가 속으로 세어보니 전화 통화 말고 얼굴을 직접 보는 건 4년만이다.
'나야, 뭐 잘 지냈지. 근데 너는 괜찮냐? 좀 복잡하게 살았던 거 같은데..'
씨익 하고 웃지만 녀석의 그늘은 좀 더 깊어졌다. 창밖에는 비가 내린다. 담배연기가 자욱한 늘 가던 단골 바에서 녀석을 만나기로 한건 우리가 자주 다니던 추억의 장소가 바로 여기이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여기도 오랫만이다. 한 6~7년 됐나? 아직도 그대로 있네. 신기하다. 야'
'그렇지? 우리가 대리 달고 나서 부서 바뀌기 전까지 열심히 다녔으니까. 너 다음달에 주재원 파견 나간다면서? 어디라고 그랬더라. 파리?? 야.. 부럽다. 잘 나가는 최과장'
'무슨 말씀을.. 뉴욕에서 잘나가고 있는 사람은 누군데. 너 얼마만에 온거냐? 잠깐 온거야??'
'어.. 신사업 보고때문에 보스가 들어왔는데 그냥 수행해서 온거지. 아주 그냥 주재원이라는게 벼슬이 아니더라고. 준비는 다했냐?? '
'짐은 대충 쌌고 우리 보스랑 주재원 가족들이랑 회식도 마치고 이제 가기만 하면 된다. 아주 그냥 홀가분하네. 헤헤'
30대 중반이 되어서도 신입사원때처럼 가볍게 웃는 녀석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우리는 신입사원 연수때 처음 만나서 친구가 되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녀석은 엘리트 코스라는 말의 전형적인 표본이었다. 부자라고 재수없게 구는 막자란 놈들과도 달랐고 무엇보다 훤칠한 키에 모성본능을 불러일으키는 하얀 피부와 쌍꺼풀 없는 동안은 동기 여사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저녀석의 저 웃음에 잠 못이루던 여자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살짝 모자라는 학벌에 내세울게 없는 집안을 빽으로 가진 내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건 순전히 녀석이 친근하게 대해준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피해의식이 내게는 있었다. 물론 녀석을 노리던 여사원들이 상담을 청해온 것도 나였고.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내가 제법 인기남으로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잘 됐네. 이번에 가면 빡세게 일이나 해라. 한 5년만 구르다 오면 경력에도 도움이 되고 좋겠지. 아오.. 나는 이제 1년 남았다.'
'야, 주재원 나가면 힘든 건 없냐? 듣기는 많이 들었어도 그게 듣는거랑 같은 건지도 모르겠고.'
'머.. 기본적인 회사일은 똑같은데 아무래도 그쪽이 별개의 회사처럼 움직이니까. 하던 일만 열심히 해도 문제는 없을거고 아무래도 생활에 적응하는게 문젠데 파리도 대도시니까 문제는 없을거야. 그건 그렇고.. 너.. 재혼했다며?'
'어.. 너도 들었냐?' 겸연쩍게 웃는 친구의 모습이 쑥스러움을 타는듯 했다.
친구는 신입연수에서 만난 세살 연하의 미인과 사내 결혼을 했다. 선남 선녀라는 말에 어울리는 커플이어서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완벽한 결혼이었다. 집안끼리도 격이 맞았는지 모호텔에서 열린 화려한 결혼식은 연예인 뺨치게 북적거렸다. 물론 그 뒤에는 눈물을 삼키며 축하를 했던 남,여들이 무수했겠지만.
화려하게 턱시도를 입은 친구의 모습도 모습이지만 재학중에 미스 유니버스에 입상한 경력이 있다던 신부도 연예인 못지 않은 미모의 소유자라 참석했던 신랑의 친구들은 넋을 잃고 친구의 행운을 부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서 오고갈때도 단연 눈에 띄는 미모였지만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가히 선녀가 강림한 모습같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친구의 불행을 점칠 머리도 사회경험도 없었다.
'그러고보니 너 힘들다고 우리가 술마셨던데도 여기네. 그때도 비왔던 거 같은데..'
'그러네. 그게 벌써 몇년전이냐. 참.. '
말끝에 내뿜는 담배 연기가 어두컴컴한 바를 비추는 조명위로 날아간다. 실내에는 챗 베이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마이 스위트 발렌타인을 부르고 있다. 문득 시간이 5년전의 그날로 돌아간다.
결혼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친구는 아내의 사생활에 대해 아는바가 없었다. 그냥 예쁘고 똑똑하고 섹시하기까지 한 여자라는 것만 알았고 그것으로 만족했다. 집안끼리도 비슷한 수준이었으니 결혼 허락을 받는 것도 일사천리였던데다 연애도 달콤했다. 간혹 잠자리를 함께 할때면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결혼하고 나면 달라질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만 하고 있었다.
상대방을 너무 모르고 결혼을 했다는 후회는 금새 찾아왔다. 친구의 아내는 천성적으로 몸이 뜨거운 여자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건 친구와 그 주변 사람들뿐이었는데 친하다는 이유로 내게도 숨겨왔던 비밀이 드러난 건 내가 뉴욕으로 파견나가기전이었다. 부서 회식에서 술이 거나하게 취한 다른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간 몰랐던 친구의 아내에 대한 평판을 듣게 된 것이다.
내 친구의 아내가 회사에서 소문난 바람둥이였다고. 술만 마시면 상대방을 집에가지 못하게 하는 타입이었는데 상대가 기혼이던 미혼이던 가리지 않았으며 용모도 따지지 않는 스타일이었다고. 그리고 자신도 그런 관계를 가진 적이 있다고. 그런 고백을 듣고 난후에 난 진심으로 친구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지만 행복해 보이는 친구의 결혼생활에 재를 뿌리고 싶지도 않았고 모른척 하는 것이 도와주는 일이라는 생각밖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에게서 전화를 받고 이 자리에 앉았던 것이 5년 전이다.
'야, 아주 미치겠다. 난 어떡하면 좋냐??'
만나자마자 작정한 사람처럼 술을 물처럼 들이키던 친구가 쾡한 눈으로 내게 물었다.
'그러니까.. 너네 집사람이 바람을 피웠다고?? 그 얘기냐?? '
'이번에 아주 짐싸서 나갔더라. 회사 갔다 오니까. 자기 옷가지 하고 소지품만 챙겨서 나갔어요.'
'상대방이 너네 아파트 사람이라고? 뭐 그런 일이 다있냐?? 그 미친 년놈들은 어디서 뭐한대?'
'휴~~ 오피스텔인가 원룸인가 얻어서 살림 차린 모양이더라. 이사가려고 집도 내놨다. 너같으면 살 수 있겠냐? 그런 집에.. 아.. 정말 아무 생각이 안든다.'
'그새끼는 뭐하는 놈이래??'
'나보다 두살인가 많은 성형외과 의사랜다. 오다가다 인사하면서 안면을 텄는지 이것들이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모르겠어. 아주 돌겠다.'
친구가 결혼을 한지도 3년째, 그동안 간혹 소식을 전할때마다 그런 눈치는 있었지만 잠자리 문제때문에 갈등이 많았던 친구 부부는 1년전부터는 거의 각방을 쓴 모양이었다. 성에 대해 담백한편인 내 친구에 비해 남자를 알만큼 알았던 친구 와이프가 몰라도 먼저 유혹의 손길을 뻗지는 않았을까? 자연스럽게 병원에 방문해서 식사나 하자고 한 자리는 이내 잠자리로 이어졌을 것이다. 미인의 유혹을 거절할 수 있는 남자가 전체의 28%인가 라는 통계도 있던데.. 아마도 잘못된 통계일 것이다. 10% 미만이 아닐까.
'짐싸서 나간거 보고 멍하니 있는데 그 새끼 집에서 연락이 왔더라고. 그 집 와이프가 전화를 했는데 어떻게 우리 마누라랑 바람난 걸 알았는지 바로 나한테 인터폰이 왔더라. 아주 울고 불고 난리가 나서 달래느라 죽는지 알았지 뭐냐. 기가 막혀서 말도 안나오더라. 그나마 그쪽은 수상하기도 하고 해서 사람 시켜 알아보려던 참이었나봐. 그런데 그러기도 전에 그냥 짐싸서 둘 다 나간거지. 참.. 더럽게도 엮였지 뭐냐. 그 아줌마도 참 안됐어.'
'그나저나.. 제수씨랑은 얘기해봤냐? 다시 화해해서 살 생각은 없고?'
'한번 떠난 마음이 어디 그렇게 쉽게 돌아오겠냐. 나도 만정이 떨어져서 여자라면 아주 지겹다. 이참에 그냥 이렇게 홀가분하게 혼자 살아 볼란다. 그나마 애라도 없으니 다행이지. 아주 끔찍하다. 생각만 해도.'
고개를 휘휘 젓는 친구에게 해줄 어떤 위로도 내게는 없었다. 평범하게 연애하고 결혼해서 아이 하나를 둔 나는 생이 주는 소소한 행복을 맛보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곧 시작될 미국에서의 생활이 친구의 미래보다 내게는 더 중요했다. 그날은 기억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고 여자들을 저주하다가 사는 얘기를 하다가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후로 간간이 만남을 이어오다가 파견나온 이후에는 4년만에야 다시 이 친구를 만난 것이다.
그동안 이친구는 재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같은 회사에 있다보니 신경쓰지 않아도 들리는 소식이 제법 있기 때문인데 직접 나에게 전화를 걸거나 연락이 없었던 건 아무래도 쑥스러움이 반, 부끄러움이 반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제수씨는 소개 안시켜 줄거냐? 언제 한번 봐야할텐데.. 여자한테 진저리를 치던 니가 고른 사람이니까 저번보다 더 미인이겠지?'
'그게 말이지... ' 말끝을 흐리며 배시시 웃는 친구 녀석의 말에 겸연쩍음이 묻어난다.
'너 혹시 예전 와이프랑 재결합한 건 아니지. 그때 그렇게 학을 떼놓고..'
'어.. 그건 아니고.. 그 왜 그때 얘기했던 의사 와이프 있잖냐? 우리집에 와서 울고 불고 했다던.. 그 여자랑 재혼했다. 헤헤헤'
'뭐?? 야.. 이거 진짜 쇼크다. 진짜...? 진짜??? '
그 뒤에 이어진 친구의 설명을 들으니 처음에는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끼리 서로 아픔을 달래는 수준으로 시작 했단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서로 생각하는 것도 비슷하고 맘도 잘 맞았다고. 각자 이혼 수속을 끝내고 나니 더 허탈해 져서 자주 만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정이 들어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단다.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동지적인 결합이라. 의외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게 무슨 사랑과 전쟁도 아니고.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 하다는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
'거참 신기하다. 미스 유니버스 출신이랑도 냉냉하던 니가.. 이제는 와이프 없으면 잠도 못잔다고?'
'그렇다니까.. 아주 하룻밤도 안거르고 매일 불타는 밤이다. 그냥.. 어쩌면 진짜 내 인연을 만나려고 그랬는지도 모르겠어. 지나고 나니 잘됐다 싶네.'
실연의 아픔으로 그늘진 친구의 얼굴에서 그나마 웃음이 도는 건 재혼한 아내의 이야기가 나올때뿐이니 저 얼굴은 진짜겠지. 저 행복도 진짜겠지.
'안그래도 너 만날 기회도 다시 만들기 힘들거 같고 해서 오늘 소개시켜 주려고 나오라 그랬어. 어.. 저기 왔다.'
친구가 반갑게 손을 들자 저 멀리서 아담하고 소박한 용모의 여인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다가온다. 화려한 미모의 소유자도 훤칠하고 늘씬한 글래머도 아니지만 친구의 얼굴에 웃음을 되찾아준 여자. 그리고 친구의 그늘진 얼굴에 밝은 온기를 되찾아준 여자가 다가온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