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수염을 길에 늘어뜨린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크리스마스 때 받고 싶은 선물을 말하는 장면, 한장의 사진처럼
남아있는 이 모습은 내가 떠올릴 수 있는 한에서 가장 어린 시절의
나에 관한 기억이다.
이 때가 다섯살 이었다. 유치원에서 싼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만났으니까.
언제까지 소급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단편적이라고 해도, 누구에게나
희미하게나마 아주 어린 시절에 대한 잔상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억상실증도 아닌데 그 기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면?
'옛날에 내가 죽은 집'에 등장하는 사야카가 바로 그랬다.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이 전무했고, 그것이 의아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다 사야카는 자신이 딸을 학대하는 것에 괴로워하고, 그 원인이 자신이
전혀 기억해내지 못하는 어린시절에 있다고 짐작하고는 그 어린 시절의
기억을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단서가 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열쇠와 지도였다. 그 속에 자신의
어린시절을 기억해 낼 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을 거라고 짐작한 사야카는 이 작품의
화자이자, 과거 연인이었던 나카노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나카노가 과학 잡지에 기고한 글을 보고 그에게 연락을 한 것이지만, 아마도
나카노 역시나 자신과 같은 상처를 지닌 인물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 아니었을까.
지도를 보고 찾아간 집.. 그 집은 외딴 곳에 오래 동안 방치돼 있었지만,
그곳에서 일기를 발견하게 되고, 나카노와 하루동안 머물면서, 자신의 어린시절과
관련해서 감춰진 비극을 기어코 밝혀내고야 한다.
그제서야 어린시절 기억이 왜 봉인돼 버렸는지, 왜 자신이 딸을 학대하게
됐는지, 자신이 누구였는지 기억을 되찾게 되는 사야카.
그 어린시절은 그녀에게 엄청난 트라우마였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기억을 까맣게 지워버렸던 것이다. 그녀가 되살려낸 기억 속의 사건 이후
사야카의 삶은 뿌리채 바뀌어 버렸다. 만약 온전하게 기억을 하고 살았다면,
사야카의 삶은 또 어떻게 변했을까.
그토록 알고 싶어했던 자신의 과거를 밝혀냈지만, 사야카는 그 과거를 감당할만한
정신력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것 같다. 사야카의 영혼은 가족과 함께 살았던 그 '집'
에서 그 사건과 함께 죽은 것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연극처럼 진행됐다. 과거를 밝히는 일들이 단 하룻 동안에 일어나며,
사야카와 나카노 이 두 인물의 비중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등장인물도 단촐하다.
그래서 그 집에서 발견한 일기의 내용과 두 사람의 대화에 최대한 집중하게
되고, 일기와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내용은 퍼즐 조각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내용을 시기적으로, 상황에 맞춰 가다보니,완성된 퍼즐처럼 사야카의
과거가 밝혀지게 된 것이다.
한 인간의 삶에서 모든 경험이 다 의미있는 것이 아니다. 의미없는 것들은 망각되기
마련이고, 기억하는 것만이 존재하고 체험한 것으로 존재하게 된다. 기억이 그
사람이고 , 그 사람의 인생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야카가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억을 지워버리게 된 것은
곧 사야카에겐 어린시절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가족은 자신을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이지만, 반면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부모와 자식간에 형성된 애착관계는 인성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바탕이 되지만, 가족간의 이기심이나 왜곡된 관계는 서로에게 혹은 자녀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히게 된다.
나카노가 사야카의 과거의 흔적을 더듬어갔던 사건을 다시 끄집어 낸 것은,
그가 살았던 옛집이 헐린다는 소식을 듣고 서였다. 그 역시 그 집에서 '죽은'
상처를 갖고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이란 제목은 그래서 의미심장했다.
그 집에서 사카야의 과거를 먼저 눈치 챘을 때에도 나카노는 사야카가 자신의
과거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애쓰던 것, 사야카가 집에서 '죽었던' 흔적을
발견하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 그 마음이 다 이해가 갔다. 다시 기억을 되살린
사야카가 자신의 과거와 직면하고,그로 인해 더 이상 불행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야카는 과거를 다시 되찾고야 말았고, 그 과거를 다시는 망각 속으로 묻어
버릴 수 없게 됐다.
그날 이후 나카노는 사야카에게서 온 엽서로, 그녀가 이혼하고, 딸은 남편이 키운다는
소식을 듣게 되지만 그 과거를 밝힌 날 이후 두 사람은 만나지도 못한 것은 물론이고,
전혀 소식을 듣지 못하고 살고있다.
사야카는 그 과거를 되찾게 된 것을 후회했을까? 이혼하고, 딸도 없이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역시 나 이외에 다른 누구도 아니라는 걸 믿고 앞으로도 살아갈 생각이야'라고
엽서에 밝힌 것을 보면, 과거 속의 상처를 도닥이며, 그 과거 역시나 자신의 삶
한 부분으로 받아 들이며,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딸에게 상처주지 않는 엄마가
되기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고 애쓰며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그녀의 앞날에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