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의 철학 소설 3부작 중 <평범한 인생>이라는 작품이 있다. 단순하고 뻔하게까지 느껴지는 삶에도 의미가 있다는 내용인데, <딸에 대하여>를 읽으며 그 평범성에 대해 떠올렸다. 이 책의 주인공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 평범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냥 남들처럼 사는 것, 일 년에 한두 번은 여행도 가고 남들한테 자식 자랑, 손주 자랑도 하고 그런 삶. 주인공 '나'는 결혼하기 전 교사였다. 아이가 생기고 육아를 위해 퇴직하였다가 생계를 위해 도배, 교습소, 운전 기사까지 안 해 본 일이 없다. 지금은 요양 보호사로 일한다. 사별한 남편은 해외파견 건설노동자였다. 남은 재산은 낡은 2층집 주택. 가방 끈이 긴 딸은 시간 강사로 일하는데 밑 빠진 독처럼, 계속 손을 벌린다. 이제는 주택을 저당잡아 돈을 융통해달라길래 들어와 살라고 했다. 함께 온 그 애는 딸의 오랜 동성 연인이다. 나는 그 애가 싫지만 못 본 체 한다. 딸과 그 애가 점령한 주방과 거실에서 밀려나듯, 나는 내 방에서 갑갑함을 느낀다.
다음 날, 그 애에게 집에서 마주치지 말자고 한다. 그 애는 넉달 치 집세를 냈으니 권리가 있지 않느냐 당돌하게 반문한다. 그 애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딸의 모습에 불편해진 나는 일찍 집을 나선다. 내가 돌보는 환자 젠은 젊어서 성공한 사업가였고 많은 사람들을 후원했지만... 젠을 보며 나는 나의 미래를, 딸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섬찟하다. 요양원에서 아무리 눈총을 받아도 젠을 정성껏 돌보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 나. 이제 그녀는 나를 엄마라고 부른다.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딸 대신 그 애를 붙들고 묻는다. 딸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해직된 동료들을 돕는 시위를 한다고 한다. 퍼런 멍을 달고 들어오고, 집은 행동가들이라는 사람들과 피켓으로 가득하고. 왜 정상적으로 평범하게 살지 않느냐 원망하는 나에게 그 애가 말한다. 자신이 딸의 생계를 책임진지 벌써 몇 년 째라고. 이 관계가 의미가 없다면 내가 그렇게까지 하겠느냐고. 윤택한 삶을 물려주지 못하고 경제적인 책임을 지지 못한 죄로 나는 할 말이 없다. 이게 부모로서 지은 죄일까.
주인공에게 평범한 삶이란 무난하고 안정된 삶이다. 최선을 다해 키운 딸은 똑똑하지만 사회와 타협하는 법을 모르며 제가 믿는 정의를 위해 어머니와 연인을 희생시키고 있다. 주인공은 어떤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삶이 괜찮은 삶인지는 안다. 평범한 삶. 대부분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범한 삶.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 그런 평범한 삶, 엄마는 자식이 편안한 삶을 살았으면 한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딸의 동성 연인을 못 본 체하는데 그 삶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피하고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인정하면, 딸이 앞으로 살아갈 삶은 젠의 삶과 다름없다는 예감이 들어서다. 결혼을 하면 남편도 있고, 자식도 생길 것이다. 늙고 아파도 돌봐 줄 사람이 생긴다. 엄마가 아는 평범한 삶, 젠과는 다른 삶이다. 동성애자로 설정되어 있으나 이 소설의 딸은 부재하는 아들처럼 느껴진다.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지 못해서일까? 함께 실린 평을 보면 자궁가족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그 연장선 같기도 했다. 딸의 연인은 며느리이자 또 다른 딸이고.
우리 딸은 평범하게 살 수 있었는데 왜 너를 만나서라는 원망, 딸이 이야기해주지 않는 사정에 대한 해설을 해줄 사람, 딸의 빈 자리를 채우고 나와 잘 지내보려는 끊임없는 노력. 전통적인 가족에서 며느리 포지션이 아닌가. 게다가 가장이 큰 일, 바깥 일을 하는 동안 부모와 아내의 희생은 당연시되는 것도 은근히 겹쳐진다. 연인의 엄마와 잘 지내보려는 그 수많은 노력들과 밀어냄이 맘에 차지 않는 며느리를 보는 시모 같았다. 부모가 자식을 어떤 소유물처럼 느낀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사위라면 그런 말을 안 할 가능성이 있어서? 모르겠다. 경제적 불안정성에 관하여서는 언젠가 비혼을 다짐하는 글에서 읽은 구절을 떠올렸다. 다는 기억이 안 나고 평범한 남자와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다보면 당신이 생계를 책임지게 될 시기가 온다. 남자가 퇴직해서 집에 있으면 당신은 애들 키우고 마트 캐셔, 파출부로 일하게 된다. 그 직업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경력이 단절됐기 때문이라고, 주변을 둘러보라는 글이었다. 주인공의 삶이고 우리네 삶이다.
<딸에 대하여>는 주인공, 젠, 딸, 딸의 연인, 요양 보호사 동료 등- 등장하는, 세대를 넘은 여성의 삶에 대한 글이다. 그리고 사회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어떤 안전망 바깥에 있는 삶. 그런 삶에 대한 글이다. 신념을 지키고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그를 지키며 살아가는 삶은 얼마나 불안정한가. 평범한 삶을 살아욌지만 여전히 평범한 그룹에 속하지 못한 '나'의 바람은 내일로 미뤄진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나의 세계에서 그의 세계를 이해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삶인지도 모른다. 정의와 윤리를 찾는 딸과 딸의 연인의 열정이 때론 가리워진 세상의 고독을 보지 못한 것처럼. 모나지 않고 평범한 삶이 안정과 평화를 가져올 거라고 생각하는 엄마가 세상에 맞서는 딸과 딸의 연인을 젊은 날의 치기라고 짐짓 외면하는 것처럼. 겹치지 않는 세계에 몸을 담그고 상대의 일방적인 이해를 바라는 것은 평행선을 걷는 것... 그렇다면 세계를 넓혀서 겹치는 부분을 만드는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삶이 고단하더라도 조금씩, 할 수 있는 만큼 앞으로 나아가면서.
하루를 살기도 힘겨워서 평범함이 사치가 되는 세계를 옮긴 글이다. 외롭고 서늘하고 지쳐서 놓아버리고 싶지만 놓을 수 없는, 그런 삶. 초반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대사가 마지막에 몸을 뉘이는 장면 위로 맴돈다.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