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시간여행자의 아내」를 읽고 눈물콧물 쏙 뺀 기억이 난다. 십여 년 전에 출간된 책인데, 시간 여행자의 고충과 그를 기다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책이 독특하게 느껴진 이유는 시간여행이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과거로 미래로 벌거벗은 채로 위험 속으로 던져지는 생애... 윤소리 작가의 「타임 트래블러」 또한 이러한 시간여행을 다루고 있다. 다만 시간여행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계급이 있고, 주인공 윤민호는 그 중에서도 꽤 높은 레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타임 트래커라는 점이 다르다. <백 투 더 퓨처>같이 시대를 설정해서 가는 건 아니고, 물건을 만져서 시기를 가늠하는 방식이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는데 그 결을 느끼고 시간의 문을 열어 다녀오는 식이다. 시간여행은 매력적이지만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아주 위험하다. 시간여행엔 보험이란 게 없다.
윤민호는 종가집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조실부모하고 혼자 큰 것이나 다름없다. 나이 차가 상당한 네 오빠들은 각자 가정에 신경쓰느라 누이는 뒷전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주인공 보정이라고 해서 그래도 좀 현명하다거나 외모가 뛰어나다거나 멋지게 나오곤 하는데 윤민호는 뭔가 좀 주접스럽다. 무신경하고 눈치도 없고 정의감은 넘치고 무식하고 푼수 끼도 넘치고 예의도 없고 그냥 막무가내 스타일. 어디에나 있을 법한 캐릭터인데도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다. 오지랖이 넓은 것도 어찌 보면 배포가 큰 것이고, 주위에 베푸려는 마음은 자신이 느낀 결핍을 채우려는 마음일 터기 때문이다. 나이 서른, 7년 째 짝사랑 중인데 상대에게 호구처럼 이용당해도 그러려니 한다. 세상물정에 빠삭한 것 같으면서도 영 허당이다. 그런 민호와 로맨스 관계를 형성할 상대는 박이완으로 한 살 연하이고 앤티크 딜러이다. 할머니의 유언실행을 위해 민호의 시간여행이 절실하다.
이완은 주변에 무정한 인물로 묘사된다. 청결과 정리정돈을 중시하는 민감한 성정 때문에 어릴 때부터 타박을 들은 탓에 아예 표현하지 않고 참는 편이 낫겠다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이완은 어쩔 수 없이 민호와 엮이면서 그에 대해 빨리 파악한다. 여러가지 기준미달이라 질색팔색이었지만 그 마음이 가득 찬 따뜻함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민호를 주구장창 이용해대는 인물에 경고같은 눈치도 주고, 아닌 건 아니라고 지적도 한다. 민호와 이완의 정의는 조금 다르지만 비슷하게 느껴진다. 이완이 좀 더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선이지만... 아무튼 유물 삼천여 점이 미국으로 넘어가게 생겼다. 이완이 할머니의 유산을 상속받으려면 열쇠를 찾아야하고 그를 위해 민호가 나선다. 이제껏 민호가 한 일에 비해 보수가 지나치게 적었는데 이 부분이 어떻게 해결될지 궁금하다. 이완과의 관계 발전이 영향을 줄텐데 말이다. 왜 그가 민호에 신경을 쓰게 되는지 그 흐름도 자연스럽다. 다음 편도 기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