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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경 가는 길
ecriture
2000.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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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의 첫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민음사, 1989)의 [인공정원]과 두 번째 시집 {10년 동안의 빈 의자}(문학과 지성사, 1994)의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를 찬찬히 눈여겨보았던 독자라면 이번 세 번째 시집에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첫 시집에서 보여줬던 송찬호만의 언어와 그 언어로 빚어낸 세계의 독특함은 기억할 만한 것이었다. 특히 [인공정원]에서 보여줬던 그의 시세계는 언어를 질료로 하는 시가 구축해야 할 하나의 지향점으로까지 보였다. 물론 세상의 저자거리와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는, 그 시끄러움을 삶의 꿈틀거리는 언어로 포획하여 다시 세상의 한복판에 내놓는 방법도 있을 테지만, 송찬호처럼 조금은 그러한 현실로부터 몇 센티미터쯤 공중으로 떠올라 우리에게 자신이 가고자 하는 세계를 은밀히 건네어주는 시인도 필요하다.
주제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두 시집은 조금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그의 시적 원동력을 상상력에서 얻고 있다는 점이다. 그
상상력은 현실에 뿌리를 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현실로부터 자유로운 세계를 지향하고
자 하는 상승적 상상력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은 삶으로부터 도망이 아니다. 어쩌면 '부정적
로트레아몽 콤플렉스'라고 불러야 할 지도 모를 동물적인, 그러나 자기 내부로 향한 공격성
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상상력은 현실계를 떠나 단순히 상상계로 진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현실의 단단한 방호벽에 미세한 균열, 그 자리에 조금은 아름다운, 언어와 존재
의 세계를 만들어보겠다는 도전 정신이다.
그러한 그가 이번 시집을 통해 드러낸 현실의 균열의 틈은 다름 아닌 [동백]이었다. 동백
은 사자이며, 사자의 울부짖음이며, 뚝뚝 끊어져버리고 말 목숨이며, 山經이다. 산경에 이르
는 길은,
壬申年 음력 동짓달 초하루, 파도가 잦아들자 동백국
으로 떠나는 배를 띄웠다 배에는 가축과 곡식 검은 부싯
돌과 흰 물을 실었다 가축과 곡식은 외눈이 반쪽이 쭉정
이 따위의 불구이거나 이름이 없는 무명의 것들로 동백
국에 가서 그들의 병을 씻어주고 귀한 이름의 종자로 얻
어올 작정이었다 배는 쉼 없이 나아갔다 그러나 동백국
길은 얼마나 멀고 험하던가
- [동백國에 배를 띄워보내다], 일부
무릇 생명이 태어나는 경계에는
어느 곳이나
올가미가 있는 법이지요
그러니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에
저렇게 떨림이 있지 않겠어요?
꽃을 밀어내느라
거친 옹이가 박인 허리를 뒤틀며
안간힘 다하는 저 늙은 동백나무를 보아요
그 아득한 올가리를 빠져나오려
짐승의 새끼처럼
다리를 모으고
세차게 머리로 가지를 찢고
나오는 동백꽃을 이리 가까이 와 보아요
- [관음이라 불리는 향일암 동백에 대한 회상], 일부, 이하 강조 필자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 [동백이 활짝] 전문
그에게 동백은 현실의 꽃이자 현실 너머의 꽃이다. 검은머리 나무는 어디에 그 붉음을 가
지고서 이 세상에 꽃을 틔워보내는가. 틔워보냄은 뛰쳐나옴이다. 그 움직임의 역동성, [사자
]의 동물성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 그런 것이 송찬호만의 상상력이다. 왜 그는 멀고도 험한
붉은 나라, 동백국에 가려고 하는가.
저 길길이 날뛰던 무쇠 덩어리도 오늘만큼은
화사하게 동백 열차로 새로 단장됐답니다
삶이 비록 부스러기 쉬운 꿈일지라도
우리 그 환한 백일몽 너머 달려가 봐요 잠시 눈 붙였다
깨어나면 어느덧 먼 남쪽 바다 초승달 항구에 닿을 거예요
- [동백 열차] 일부
동백국은 부스러지기 쉬운 꿈 너머의 백일몽 같은 나라다. 비록 그것이 백일몽이라 하더
라도, 우리는 꿈꿔야 한다. 먼 남쪽 바다 초승달 항구를.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정
말 꿈이 아닐까. 마치 우리가 꿈을 꾸고 나서 그것이 꿈이었구나 깨닫는 것처럼 우리의 현
실은 우리가 깨닫지 못한 꿈일지도 모른다. 미처 동백이 찬연히 피어있는 것을 다 둘러보기
도 전에 동백은, "동남풍/바람의 밧줄에/모가지를 걸고는/목숨들이 송두리째/뚝, 뚝 떨어져내
([나, 동백꽃 보러 간다] 일부)"리고 만다. 멀리서는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사라져버리는 동
백,은 어찌보면 그가 기다리는,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詩 한 편이며, 노래이다.
삶이 어찌 이다지 소용돌이치며 도도히 흘러갈 수 있단 말인가
그 소동돌이치는 여울 앞에서 나는 백 년 잉어를 기다리고 있네
어느 시절이건 시절을 앞세워 명창은 반드시 나타나는 법
유성기 음반 복각판을 틀어놓고, 노래 한 자락으로 비단옷을 지어
입었다는 그 백 년 잉어를 기다리고 있네
들어보시게, 시절을 뛰어넘어 명창은 한 번 반드시 나타나는 법
우당탕 퉁탕 울대를 꺾으며 저 여울을 건너오는,
임방울, 소리 한가락으로 비단옷을 입는 늙은이
삶이 어찌 이다지 휘몰아치며 도도히 흘러갈 수 있단 말인가
- [임방울] 전문
여기에서 그의 시세계의 방향성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시가 백 년 잉어가 되기
를 희망하는 것에 다름아닌 것이라는 것을. 산경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인상깊은구절]
삶이 어찌 이다지 소용돌이치며 도도히 흘러갈 수 있단 말인가
그 소동돌이치는 여울 앞에서 나는 백 년 잉어를 기다리고 있네
어느 시절이건 시절을 앞세워 명창은 반드시 나타나는 법
유성기 음반 복각판을 틀어놓고, 노래 한 자락으로 비단옷을 지어
입었다는 그 백 년 잉어를 기다리고 있네
들어보시게, 시절을 뛰어넘어 명창은 한 번 반드시 나타나는 법
우당탕 퉁탕 울대를 꺾으며 저 여울을 건너오는,
임방울, 소리 한가락으로 비단옷을 입는 늙은이
삶이 어찌 이다지 휘몰아치며 도도히 흘러갈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