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1 내 이름은 잔이다. 나이는 아흔 살이다. 젊을 때는 키가 163센티미터였다.
우리는 섣불리 90대의 나이를 상상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와는 무관할 것 같은 먼 미래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주변에서 90대의 나이를 가진 분을 접하기가 쉬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지만 마냥 가벼운 마음으로 상상할 수 있는 나이는 분명 아니다.
작가는 노년의 시간을 1년 단위가 아닌 계절로 나누면서 시간의 흐름에 대한 속도를 더 빠르게 느끼도록 하고 싶었나 보다. 우리는 흔히 인생의 속도는 내 나이가 갖는 숫자라고 농담을 한다. 20대까지는 시속20KM에 대한 강박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40이 넘어가면서는 시속40KM에 대한 부담감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작가가 계절을 요란스럽게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소설 속에 프랑스의 시골 농가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스레 계절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겨울이다’라는 표현으로 이제 잔에게 생동하는 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을 갖게 하기도 했다.
처음엔 이 소설의 소소한 일상들이 주는 편안함에 90대의 잔은 적어도 가을을 보낼 때까지는 우울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완독 후 책갈피를 다시 읽어 보니 그렇지 않았다. 사이사이 잔의 우울감이 보였고 앞으로 다가올 나의 90대에 대한 걱정들을 지레 짐작하도록 하고 있었다. 일기가 너무 일상적으로 흘러 그 당시에는 그 부분에 집중하지 못했었고 또 아직 그 나이가 되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완전히 공감할 수 없었던듯하다.
지금까지의 나는 독신으로 골드미스로 살거나 자식없이 여유롭게 사는 것도 좋았겠다라는 생각을 꽤 오랫동안 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 다른 가족들이 나의 미래에 무조건 힘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혼자 늙어가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고 혼자 남겨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너무 무섭다는 것이다. 그러니 늙어서 함께 한 추억들을 떠올리고 예전엔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하고, 깨닫지 못했던 것을 얘기하는 것은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작가에게 감사하고 싶은 것은 소설의 마무리를 깔끔하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여운이 남는 것은 그닥 반가운 것은 아니다. 쓸데없는 공감 능력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어도 그 상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91세의 잔이 결국 봄을 맞이하지는 못했지만 상쾌한 산들 바람을 느끼며 잠의 안개속에서 미소로 마중나온 남편을 맞이하는 것은 내가 갖고 싶은 삶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렇게 수월하게 읽은 프랑스 문학은 몇 없었다. 올해의 독서의 시작으로 참 괜찮았다.
P33 나는 일단 의식을 놓은 후에 죽음을 맞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아무 자각도 없이 그냥 웃다가 혹은 잠든 사이에 이승을 하직하면 좋겠다.
P47 내 나이쯤 되면 포기할 건 포기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육신을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리기 위해 옷을 입어야 한다.
P106 방송을 보면서 나는 조금 막막해졌다. 새로운 발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우리에게 점점 더 넓은 우주를 보여준다. 수십억 별과 행성이 쉬지 않고 도는 어둠의 세상. 우리의 지구는 그 세상에서 푸른 구슬 한 알에 불과할 뿐… 하느님은 어디에 계실까? 천국은 어디 있을까? 르네, 에드몽드, 르포르 부인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어디로 갈까?
P151 희안하게도 세월이 갈수록 죽음 앞에서 초연해진다. 심지어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의 죽음조차 그렇다. 사별도 많이 겪어보면 익숙해지는 걸까.
P170 내가 그들의 생기 없는 눈동자에 잠시 빛이 돌아오게 하면 스무 살 때처럼 기분이 좋다. 명줄이 얼마 안 남았어도 누군가의 마음에 든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얼굴 붉어지는 나이가 따로 있지는 않더라.
P190 딸이 내 팔짱을 끼고 부축을 하면서 걷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미가 늙은 모습을 보기가 괴로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저 애도 익숙해질 때가 됐는데…
P197 그리고 우편물이 하나도 없는 날은 슬플 것 같다. 아직까지는 아침에 아무것도 없는 현관 옆 탁자를 보느니 종이 쓰레기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다.
P236 매년 시월은 풍경을 새로 그린다. 매년 나는 이렇게 고운 색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나 싶다.
P254 여의사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유방 촬영을 한 게 언제인지 물었다. 세상에, 이게 뭔 소리람! 평생 단 한 번도 유방 엑스레이를 찍은 적 없는데 굳이 아흔 살에 처음으로 찍을 필요가 있을까. 뭐에 써먹으려고? 설령 나에게 몹쓸 종양 같은 것이 있더라도 이 나이에 치료를 받는 게 옳을까? 장수의 복을 누리는 삶한테서는 그런 병이 아주 서서히 진행된다. 그러니까 내 몸에도 어디 한두 군데쯤 암세포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내 나이에는 병도 느릿느릿 진행되기에 큰 소란을 떨지 않고 화도 거의 끼치지 않는다.
P274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이제 나는 나 아닌 사람들의 괴로움을 살피려고 충분히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아마 내게 남은 시간이 나한테 쏟기에도 부족해서 그런가 보다. 이제 내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들이 많아졌음을 깨닫는다. 살날이 줄어들수록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 같다. 감정도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닳아빠지고 무뎌진다. 분노는 꺾이고, 애정은 잠들고, 연민은 시든다. 소란스러운 세상사가 우리에게는 아주 먼 곳의 일, 이제 우리와 상관없는 생의 희미한 메아리 같기만 하다. 타인들의 슬픔이 우리네 연약한 생의 점점 더 짙어가는 안개 속에서 희석되기에 예전처럼 생생하게 와 닿지 않는다. 사람들이 죽고, 고통스러워하고, 눈물 흘린다. 우리는 우리 앞가림만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처럼 오래 살지 못한 이들이 일깨워주는 우리의 늙어빠진 모습을 거울 속에서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시선을 돌린 채 우리네 옹색한 삶을 영위하기에 힘쓰며 우리도 이제 끝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잊고 싶어 한다.
P289 이 모든 일이 거의 60년 전이라는 생각을 할 때면 나는 현기증이 나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어떤 추억들은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옛날에는 그렇게 가까웠던 사람들의 얼굴이 이제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 어머니 아버지 얼굴도 희미해져 가고 목소리도 생각이 날 듯 말 듯하다. 나의 청춘이 흐려지고 색이 바랜다. 나의 지난날은 물이 쏟아진 수채화 같다. 그렇게 어떤 이름이 나에게서 도망가고 어떤 추억이 사라진다. 어떤 날짜, 어떤 나이… 바로 이런 순간에 세월의 무게가 여실히 느껴진다. 부모님, 삼촌, 이모, 사촌, 옛날 친구가 그립다. 이제 나에게는 아무도 없다. 어떤 이미지, 어떤 이름, 어떤 말, 어떤 장소를 나에게 확인시켜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너도 기억나니?”라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나 홀로 이 보잘것없는 기억력, 누렇게 변한 사진들을 붙잡고 있다. 망각과 함께 나 홀로 남았다.
P299 그런 편지를 받으면 정말로 기쁘다. 내가 아직도 조금은 쓸모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 늙은이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노인은 사회의 짐이다. 이런 소리를 얼마나 자주 듣는지 모른다. 그래서 내 딴에는 가급적 가벼운 짐이 되려고 애쓴다. 내가 만드는 일자리도 한두 개쯤은 있다. 우리 앙젤이나 정원사 같은 사람에게 작으나마 일거리를 주고 있으니까…
P335 페르낭과 마르셀이 떠나는 날이 오면 내 인생에서도 한 부분이 완전히 멎어버릴 것이다. 삶은 죽음과 함께 어느 날 갑자기 멎어버리는 게 아니다. 삶은 훨씬 일찍부터 한 조각 한 조각씩 우리를 떠나간다.
P374 내가 이제 주님께 가까이 와 있는 걸까? 아침에 침대에서 기도를 했다. 아니, 기도문을 암송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냥 주님께 내 얘기를 했더니 묘하게 기분 좋은 느낌이 나를 감쌌다. 나는 그 초자연적인 평화에 젖어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그 상태에서 조용히 떠날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나를 이승에 잡아놓지 못할 성싶었다.
P391 몹시도 서글픈 2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던 마르셀이 그립고, 설탕 그릇을 보면 가슴이 아리고, 도망친 소가 우리 집 화단에 들어오거나 말을 탄 영감이라도 불쑥 나타났으면 좋겠다 아무라도 “안녕하세요!”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아무 일이라도 일어났으면. 여기저기 전화를 돌릴 핑계라도 있었으면. 놀라운 모험담, 재미있는 우스갯소리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상대가 없다.
P396 분발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건강하게 버텨야 한다. 자식들이 요양원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피곤해서 밖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을 때에도 무리해서 조금이라도 산책을 한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 나이에 늘 하던 일을 중단하면 그 일은 영영 못하는 거다.
P427 어느새 나는 배에 올라와 있다. 아주 작은 돛단배다… 갑판에 누워 구름 없는 하늘로 솟은 돛대를 바라본다. 바람은 상쾌하고 소리 없이 서서히 움직인다. 나는 겨울과 함께, 나의 마지막 겨울과 함께 잠들리라. 계절의 끝에서, 햇살을 받으며, 종려나무 가지를 높이 든 채로, 르네가 나를 보고 미소 짓는다.
체리토마토파이 ? 우리 나라에서 방울토마토라고 부르는 것이 프랑스에서는 체리토마토라고 한다. 쟌이 실수로 체리대신 체리토마토로 파이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제목만으로도 뭔가 다정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정작 소설속에서는 이때만 언급되었을 뿐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