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사형집행인의 딸’의 3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출간된 시리즈 중에서 이 책이 가장 완성도가 높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중에서 가장 흥분감을 주었던 것은 2부였던 ‘검은 수도사’ 였지만 나중에 실망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이 책은 끝까지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아파서 누운 상태에서도 책이 궁금해서 이리저리 뒤척여가며 읽어 내려갈 정도였다면 말 다한거지 싶다. 음… 하지만 약간의 아쉬움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살짝 윙크해 주며 ‘이 정도는 뭐’하면서 봐줄 수 있을 것 같은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마지막 부분이었다. 고향에 돌아오니 흑사병이 돌아서 미움쟁이들이 다 없어져 버렸다는 것? 아! 이 얼마나 깔끔한 정리란 말인가?
이 시리즈가 주는 첫 번째 특징 바로 등장인물 소개에 있다. 그걸 알고 있기에 책을 접할 때마다내게는 등장인물 소개가 꽤 흥미롭게 다가온다. 분명히 작가는 그저 한 줄로 이름과 직업을 적어 놓지만 그 안에는 분명 스토리를 끌고 가는 몇 명의 굵직한 인물들이 있다. 그 역할이 비록 악인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그저 스치듯 적어 놓은 인물들을 한 번쯤은 주의깊게 주시할 것. 그들은 분명 책 속에서 살아 숨쉬며 우리에게 말을 걸어 줄 것이다.
숀가우의 사형집행인 야콥 퀴슬은 레겐스부르크에서 목욕탕집 안주인으로 살고 있는 여동생이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레겐스부르크로 떠난다. 하지만 레겐스부르크로 들어가는 성문에서 경비병과 시비가 붙는 바람에 하룻밤 감금되고 어쩔 수 없이 이튿날 목욕탕으로 찾아 간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를 맞이하는 것은 동생부부의 싸늘한 주검이고 곧이어 들이닥친 경비병들로 인해 그는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숀가우의 집에 가족과 함께 남은 막달레나는 제빵업자의 하녀인 레즐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달려간다. 하지만 부정으로 임신하여 유산하기 위해 맥각을 복용한 레즐이 과다복용의 후유증으로 죽게 되고 맥각을 소지하게 된 경위를 밝히던 중 레즐에게 아이를 임신시킨 제빵업자와 지몬의 아버지가 관련된 것임을 알고는 경악한다. 막달레나는 제빵업자를 몰아세우는데, 그날 밤 제빵업자를 필두로 한 자경단이 막달레나의 집 앞에 몰려오고 급기야는 막달레나의 가족을 위협하고 집에 불을 지른다. 하지만 때마침 법원서기가 도착해 자경단을 해체시키고 심지어는 둘이 헤어질 것을 권고하자 둘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레겐스부르크로 도망간다. 레겐스부르크에 도착하자마자 배낭을 도둑맞을 뻔한 두 사람은 뗏목 마스터 카를 게스너의 도움을 받고 고모가 하는 목욕탕을 찾아가지만 고모 내외는 이미 살인을 당했고 그 죄는 아버지가 뒤집어 쓴 상태이다. 간신히 아버지를 만난 막달레나는 고래 여관에 여장을 풀고 아버지의 말에 따라 단서를 찾기 위해 그날 밤에 목욕탕에 가고 지몬은 그곳에서 수상한 가루를 발견한다. 그런데 누군가 목욕탕에 불을 질러 그 둘은 죽을 위기에 처한다.
사실 내가 적은 줄거리는 거의 도입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목욕탕에 들어가서 단서를 찾는 데부터 시작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많은 이야기들이 녹아 있어서 그것을 다 언급할 수가 없는데 그렇기에 깨알 같은 사건들이 줄을 이으면서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던 것 같다. 너무 우연성이 심하지 않느냐고 한다면 글쎄 그건 픽션이 주는 기본적인 특성이 아닐까?
이 이야기의 주된 이야기는 그 시대 독일의 권력자들이 모두 모여 회의를 하던 라이히슈타크(제국 의회) 전복이지만 숀가우의 사형집행인인 야콥 퀴슬과 그의 아내 안나 마리아의 과거의 이야기가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야콥 퀴슬이 용병이었음은 이미 전작들을 통해 얘기한 바가 있으므로 생략하고 전쟁중에 만난 두 사람의 이야기는 비극적이기도 하고 운명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야기에서 짧게 다루지만 한 번 가지기 시작한 의심이 사람의 마음을 피폐하게 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솔직이 이 책의 부제가 왜 ‘거지왕’일까를 생각해 봤다. 여러 등장인물들이 동등할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 관계로 굳이 거지왕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데는 살짝 애매함이 있는데 책 뒤편 ‘감사의 말’을 보니 작가가 매우 만족해 하는 자신이 창조해 낸 캐릭터였던 것이다. 이 책에는 거지왕 나탄 뿐만 아니라 이태리 대사 실비오나 뗏목 마스터 카를 게스너도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모두 선인은 아닌 악인도 있고 실리적인 이도 있다. 그리고 또 중요한 인물로 레겐스부르크의 사형집행인인 필립 토이버도 있다. 그들의 역할은 거의 쌍벽을 이룰만큼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다고 봐도 좋다. 그만큼 각각의 캐릭터가 자신만의 개성을 뽐내며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끌어 가고 있다는 얘기다. 거지들의 활약, 필립 토이버의 신뢰, 야콥 퀴슬의 걱정과 인내, 지몬과 막달레나의 사랑싸움, 게다가 풍부한 배경요인이 되어주는 현장감 물씬 나는 묘사들. 가루를 둘러싼 위험한 목적과 두 사람의 한 사람을 향한 복수극이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데 영화로 찍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도 최고일듯하다.
책의 말미에 가면 작가가 직접 기술해 놓은 친절한 ‘레겐스부르크 여행안내서’를 볼 수 있어서 그곳에 가면 한번쯤 둘러볼 수도 있겠다 싶다. 단, 그곳이 작가의 상상속에만 존재하는 곳인지 아닌지 꼭 확인해 보라는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