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을 읽고 나자 이제 진짜 나의 공감대속에 들어오는 청소년 시절의 그녀들이 만나고 싶어 바로 집어 들었다. 시리즈는 이게 문제다. 궁금하면 열 일을 제쳐두게 되니 말이다. 우선순위가 이리도 바뀌니 독서계획에 지장이 막대하다 할 수 있겠다.
<줄거리>
1권의 마지막에 자신이 디자인한 구두를 적이라 생각하고 있는 솔라라 집안의 장남인 마르첼로가 신고 있는 것을 본 릴라는 배신감에 치를 떨고 이를 시작으로 릴라의 결혼생활은 기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며 폭력으로 결혼 첫날밤을 맞게 된다. 릴라의 남편 스테파노는 자신과 자신과 관련된 일에 적대적이기까지 한 릴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폭력을 행사한다. 릴라는 계속 제 멋대로 행동하다가 유산을 하게 되고, 결혼을 했음에도 지속적으로 릴라를 유혹하는 솔라라 집안의 차남 미켈레의 계략으로 상황은 더 악화되고 릴라 집안의 구두사업은 점점 위기에 처하게 된다. 니노가 이스키아 섬에 있는 것을 안 레누는 그를 보기 위해 건강회복을 위해 해수욕을 처방받은 릴라를 그곳으로 데려가지만 정작 그곳에서 재회한 릴라와 니노는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은 점점더 위험한 상황을 연출한다.
결혼을 하게 된 릴라와 학업을 계속 하게 된 레누는 서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레누는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계속함으로써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면서도 한번씩 릴라로부터 상처를 받는데 청년기를 지나는 레누의 심경변화와 고민은 점점 더 심해진다. 특히 릴라와 관계된 일에는 이중적인 면을 보이기도 하는데, 릴라의 뛰어난 점을 동경하고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릴라의 명석함이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부분이 특히 더 그렇다. 그러면서도 릴라의 인생속에 자신이 함께하지 못할까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레누는 자신이 이루어가는 성공들이 사실은 릴라의 명석함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릴라가 레누에게 맡긴 릴라의 노트를 아르노 강에 던져버린다. 그렇게함으로써 자신의 열등감과 릴라의 뛰어남을 숨기고 싶어하는 것이다.
P18 결국 어느 11월 저녁, 나는 너덜머리가 나서 상자를 들고 집을 나섰다. 이미 나폴리에서의 삶을 접은 지 오래였고 나름대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릴라가 내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중략) 마침내 상자가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릴라의 말과 생각, 자신에게 상처를 준 주변의 모든 이에게 아픔을 되갚고야마는 독한 근성, 사람, 물건, 사건, 지식 할 것 없이 나를 포함해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것을 장악하는 능력을 담은 상자는 그 자체가 릴라인 양 강물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책과 구두, 달콤한 추억과 폭력으로 인한 상처, 결혼식과 신혼 첫날밤, 신혼여행 후 라파엘라 카라치 부인으로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 일어난 모든 일과 함께.
릴라의 괴팍한 생각과 행동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는 기회를 원천봉쇄한다.
릴라의 난폭성과 막돼먹음이 다른 사람들이 릴라에게 갖고 있는 호감을 가지고 다가갈 길을 차단시켜 버리고 마는 것이다. 글의 흐름이 레누의 시선을 따라가기 때문에 솔직히 가끔 릴라의 행동은 나를 헷갈리게 하기도 한다. 레누의 생각을 통해 릴라의 의도가 이렇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사실 ‘릴라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 질투심과 열등감과 착한 척을 하고 있는 레누의 눈에는 그리 보이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게도 된다. 독자로써 오류에 빠진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게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으로는 책의 마지막에 ‘그런데 알고 보니 나의 오해였다’ 이러면 정말 당황스러울 듯한데 그럼에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어릴 적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던 고향을 떠나 피사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레누. 고향인 나폴리에서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지적이고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어하고, 피사에서는 자신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님이 탄로날까봐 걱정하지만 다행히 이 부분은 성적을 높이기 위해서 또 자신에게 가면을 덧씌우기 위한 노력으로 연결되고 상당부분 성공한다. 그리고 레누도 나이를 먹어 가며 자신이 한심하게 여겼던 엄마 세대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화자인 레누의 시선과 고민은 성장하면서 변화를 맞고, 절망의 시간속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고 후회하기도 하면서 인생의 궤적을 쌓아 가지만 릴라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여전히 비판적인 측면을 놓지 못한다. 결국 능동적이었던 릴라가 니노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인정하고 자포자기하기도 하며, 한번씩 릴라를 통해 자신의 학교생활이 릴라의 경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매순간 자신의 대단함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릴라를 통해 상처를 받는다. 부유하지만 자신의 주변과 싸우느라 점점 더 건조해져 가는 릴라와 다른 사람들에게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 노력과 자기 비하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해야만 하는 레누의 삶, 그들의 삶은 누구 하나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P222 나는 아연실색했다. 릴라의 독설은 내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순간을 내가 나 자신을 조롱거리로 전락시킨 실수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릴라의 말을 믿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순간 릴라는 내게 진정 적의를 드러냈고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릴라는 멀쩡한 사람을 속 터지게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가슴에 파멸의 불꽃을 일으킬 줄 알았다. 질리올라와 피누차의 말이 옳았다. 사진 속의 릴라는 악마처럼 스스로 타오른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릴라를 진심으로 증오했다.
P404 불편듯 왜 내가 아닌 릴라가 니노를 차지하게 됐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감정에 몸을 내맡길 줄 모른다. 감정에 이끌려 틀을 깨뜨릴 줄 모른다. 내겐 니노와 단 하루를 즐기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릴라와 같은 강인함이 없었다. 나는 항상 한 발짝 뒤에서 기다리기만 했다.
이 소설에는 나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다. 성적으로 훨씬 개방되어 있음도 그렇고 내용들도 이건 뭐 우리나라 아침드라마의 특징인 막장드라마의 정석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재미있다고 느낀 것은 우리는 보통 백마탄 왕자 또는 신데렐라신드롬을 얘기하는데 이들은 첩에 대한 일종의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인즉슨, 본처는 악랄하기에,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후처인 나의 진정한 사랑이 결국엔 남편의 사랑을 얻는다는 것인데,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백마탄 왕자님이나 신데렐라 스토리보다는 조금 더 현실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전혀 이해 못할 일도 아닌 듯 하다.
대학생활의 마지막에 레누는 뜻하지 않게 책을 출간하게 된다. 답답한 자신의 심정을 정리하기 위해서 또 연인인 피에트로에게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작성한 글이 피에트로와 그의 가족들에 의해서 출간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가장 축하받고 싶었던 릴라에게서는 제대로 된 축하를 받지 못한 채 상처만 받고 릴라를 찾아간 것 자체가 또한 자신의 허영심의 한 부분이었음을 깨닫는다. 릴라는 다른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P652 순간 나는 내가 거기까지 릴라를 찾아간 것이 교만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좋은 마음에 애정을 가지고 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그 긴 여행이 결국 릴라가 잃어버린 것을 나는 얻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라는 내가 자기 앞에 나타난 순간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동료와의 마찰과 범칙금을 낼 수 있는 위험을 무릎쓰고 지금 나에게 내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살아가면서 승리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자신의 인생은 나만큼이나 다양하고 무모한 모험으로 가득하며 시간은 그저 별 의미없이 흘러가기 마련이니 가끔 이렇게 만나 한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터무니없는 생각과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정신 나간 생각을 나누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시리즈를 다 읽고 나면 나는 ‘두 친구의 우정이야기’라기보다는 격변하는 한 세상을 치열하게 살아 낸 ‘두 여성의 삶의 이야기였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릴라의 행동은 우정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레누의 감정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다. 이런 게 무슨 우정이야! 경험상 오랜 시간 떨어져 있거나 처해 있는 환경이 다를 경우 인간관계는 소원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공부하느라고 주변 환경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레누와 싱글맘으로써 가난한 현실속에서 육아를 위해 햄공장에 다녀야 하는 릴라의 간극은 점점 벌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이 어떻게 60년 동안 인생을 연결해 갈지 궁금하다.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라는 다소 어색한 제목을 생각해보니 그것은 두 가지를 얘기한 것이 아닌가 싶다. ‘결혼하면서 성이 바꾸는 릴라와 책을 내면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레누’. 2권의 마지막에는 레누가 자신의 책 출간모임에서 공개적으로 혹평을 당하던 중 그곳에 니노가 나타나 반대의견을 펼치면서 끝난다. 그래서 나는 즉시 3권을 주문했다. 책임감 없는 니노(릴라를 임신시키고 잠시 동거하다가 도망가버렸다)가 과연 어떤 역할을 해줄지 너무나도 궁금하다.
P628 알파벳 글씨와 잉크 자국, 수많은 책과 어지러울 정도로 수많은 단어들. 그 가운데에서 작은 아씨들을 찾아냈다. 그 일이 정말 실현되려는 걸까? 릴라와 내가 함께하기로 했던 일이 나에게,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일어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몇 달 후면 내가 쓴 글을 종이에 인쇄해서 여기에 있는 책처럼 실로 꿰매고 풀로 붙일 것이다. 책 겉면에는 엘레나 그레코라는 이름이 찍히겠지. 내 이름 말이다. 이로써 집안의 오랜 문맹 또는 반문맹에 가까운 무지의 끝을 끊고 아무도 몰라주던 암울한 가문의 이름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3년, 5년 10년 또는 20년이 지나면 내 책도 저 책장에 곶이게 되겠지. 내가 태어난 이 고향 동네 도서관에 내 책이 꽂히다니. 도서 목록에 책 제목이 올라가서 사람들은 우리 동네 수위의 딸이 무엇을 썼는지 읽기 위해서 내 책을 대여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