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기술과 경제 발전으로 먹고살기가 나아졌는데도 불구하고, 삶의 속도는 왜 이렇게 빨라졌을까?
23만 년 전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에 출현한 이후 고작 200년 동안 일하는 시간은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산업혁명은 인류를 보다 나은 삶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예측과는 달리 인류를 노동이라는 삶 속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사피엔스는 해가 떠있는 시간 동안만 채집이나 수렵활동을 했고, 농경생활이 시작된 이후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계절에만 노동을 했을 뿐이다. 물론 전쟁이나 날씨에 따라 흉작으로 고통받는 삶은 살았지만, 현대인들보다는 다소 여유로운 삶을 살지 않았을까?
열심히 공부해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사회 공동체의 암묵적인 압박을 이기고 사회에 진출한다 하더라도, 더 높은 성공과 부의 창출을 위해 '시간은 돈'이라는 굴레 속에 우리 스스로를 맡긴다. 그런데, 그 굴레 속에는 자아가 있을까? 가족이나 나의 불확실한 미래를 위한 준비라는 의무감 속에 있는 자아는 나의 자아인가? 아니면 타인의 자아를 나에게 투영한 것인가? 자유 의지에 따라 내 삶의 방식을 결정했다고는 하지만, 나의 내면에 있는 욕구를 억누른 채 살아간다면 진정한 자유 의지라고 할 수 있을까? 삶은 나의 욕구와 공동체 요구의 양 끝단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맞춰 살아가야 한다. 흔히 이야기하는 일과 삶의 균형인데, 여기서 말하는 삶에 대한 해석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도 회사 생활에 거의 모든 시간을 소모하며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일이 너무 많고 일하는 방식이 효율적이지 못하고, 회사 전체적인 실력도 부족했었기 때문이다. 보고 방식이나 절차, 업무 소통 방식, 불필요한 서류 작업 등 간소화하고 축소해도 될 것 들이 오랜 기간 동안 관행처럼 이어져 왔었다. 그런데, 외국인 임원이 들어오고 경영층의 의식변화로 인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급속히 변화되고 있어 다행이다. 휴가를 쓰는 것도 눈치가 보였지만 이제는 전혀 부담스럽지 않게 사용할 수 있고, 보고를 위한 보고도 많이 줄었다. 그렇다고 일하는 시간이 줄어 일의 결과물이 저하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예전과 비교해보면 질적 성장은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책 '바쁨 중독'의 저자는 싱글맘으로 미국 방송국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으며 강연자로서, 기업인으로서 활동하고 있는데, 조금씩 성공을 해나가는 과정에서도 일은 줄지 않고 오히려 더 늘어나 지쳐갔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떻게 하면 진짜 삶을 되찾을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고,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줄 방법을 찾았다고 한다.
베스트셀러인 '말센스'의 저자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예전 모습과 생각들이 오버랩 되어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저자는 바쁨 중독에 빠지는 현상과 이유를 사회 및 역사적 관점과 본인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분석해보고 여유 있는 진짜 삶을 되찾을 방안들을 제시한다.
우리가 높은 목표를 추구하도록 고무하는 것은 건강한 신화일까? 아니면 얼마나 열심히 일하든 그와 상관없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상태로 머무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집단 망상에 가까울까? 근면이 미덕이며 인생철학이 되어야 한다는 이런 믿음은 독일의 한 교회에 붙은 격문에서 시작되었다. 장시간 열심히 일하면 구원받을 자격을 얻지만 일을 쉬면 게으름 뱅이가 된다는 풍조는 종교적 관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 관념은 몇 백 년 동안 경제 정책으로 채택되어, 피고용인들에게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최대한 노동력을 얻어낼 방법으로 쓰였다.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 논제를 제시했을 때, 그가 바꾼 것은 종교사만이 아니라, 선진 각국의 거의 모든 사람의 삶을 바꿔 놓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었다.
산업시대에는 엔지니어, 발명가, 그리고 헨리 포드 같은 기업가의 지위가 올라갔다. 포드의 노동관은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쳤고, 그의 자서전 발췌문은 산업에 관한 논문이라기보다는 설교에 가까웠다. 그의 글은 이런 식이었다. "일은 우리의 정신 건강과 자존심을 지켜주고 우리를 구원해 준다. 건강과 부, 행복은 일을 통해, 오직 일을 통해서만 확보될 수 있다." 이 아이디어가 세상에 가져온 변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시간이 돈일 때, 한가롭게 보낸 시간은 돈의 낭비가 된다. 현대 사회의 모든 스트레스의 밑바탕에는 시간은 너무 소중해서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철학이 있다. 우리는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어딘가에 쓴다. 우리에게 더 이상 여가가 없는 게 당연하다.
열심히 일해서 그렇게 많은 부를 생산했건만, 어째서 우리 자식들이 우리보다 더 잘 살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는커녕, 대부분이 간신히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느끼는 걸까? 세탁기와 전자레인지, 노트북을 가지고 있는데도 우리 할머니보다 할 일이 더 많을까?
2차 세계대전 당시 공장에서 전투기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수만 명의 여성이 징집된 남성들을 대신해 일터로 갔다. 세계적인 규모로 군수 물자를 공급하고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유럽과 미국은 예전보다 훨씬 적은 수의 노동자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생산성을 올릴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노동 시간을 둘러싼 싸움은 그 시점에서 끝난 듯이 보였다. 하루 8시간 단위로 근무하는 것이 확고히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1965년 미국 상원 소위원회는 2000년이 되면 미국인들이 주 14시간을 일하고 두 달 가까이 휴가를 쓰게 되기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현재 평균적인 유급휴가는 10일이며, 거의 4명 중 1명은 유급휴가를 전혀 받지 못한다. 슬프게도 노동 시간의 감소를 막는 두 가지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소비 지상주의의 부상과 소득 불평등의 가파른 상승이다. 많은 노동자들이 소득이 늘자 일을 줄이는 게 아니라 더 많은 물건을 사기 시작했다. 마케팅은 필요하지 않아도 매력적인 물건에 대한 욕구를 만들어내는 주요 산업이 되었다. 노동자의 급여는 인플레이션을 고려했을 때 거의 제자리에 머물거나 더디게 증가한 반면, CEO의 급여는 급증했다. 모두에게 더 여유로운 삶을 제공할 것으로 생각한 이윤은 대부분 극소수에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아주 많은 사람이 엄청난 시간 동안 일하면서도 경제적으로 나이 진 게 없다고 느끼는 이유다. 그들이 열심히 일해서 생긴 이득은 다른 사람의 계좌에 쌓인다.
우리는 깨어 있는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내야만 안정과 안락함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아이들과 미래가 살기를 바라는 삶의 방식일까?
아니면 한숨 돌리고, 휴식하고, 성찰하고, 사람들과 어울릴 시간과 공간이 더 있기를 바라는 것이 바람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