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s certa, hora incerta (죽음은 확실하지만, 죽음의 시간은 불확실하다!)
죽음! 이번에 읽은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엄청난 연구물을 읽어 소화하기도 버겁지만, 그래도 한 줄만 짚으라면 위 인용 라틴어 경구 '모르스 케르타, 호라 인케르타'이다. 이 말은 과거 『메멘토 모리의 세계』라는 책을 읽을 때 기억했던 터라 더 마음에 와닿았다. 유럽의 성당이나 광장의 시계에도 저 문구가 있다고 했다. 모르스는 로마신화에서 죽음을 의미하는가 보다. 밤의 여신 뉙스가 낳았다는데 함께 태어난 타나토스와 케레스 역시 뉘앙스는 다르지만 모두 '죽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죽음은 시간을 만들고, 시간은 죽음을 지운다.
동양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죽음을 정리한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하여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음, 즉 존재의 무상(無常)을 이른다고 정의한다. 하지만 너무 단순하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중 하나가 자신의 삶과 죽음을 시간 안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다. 외재적으로 바라보면 죽음은 영원한 생명의 질서에서 탈락이라는, 생명과 죽음을 분리해서 시간을 통한 죽음의 시각화와 연결된다. 내재적으로는 생명은 시작되는 순간부터 죽음을 내포하고 있기에 삶은 죽음의 투쟁과 균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인간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라질 뿐이다. (바우만)
'1부 살아 있는 죽음'은 전통적인 (종교적) 죽음의 이미지가 현재 우리의 시대 속에도 여전히 유효한지와 주검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장례 의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죽음의 죽음” 또는 “죽음의 살해”라고 표현하면서 근대성이 어떻게 죽음을 해체했는지를 이야기한다. 근대성은 죽음을 수많은 죽음의 원인, 즉 무수한 질병으로 해체해 버림으로써 인간은 이제 죽음과 싸우지 않고 죽음의 원인과 싸우면 된다는 것이다. 타인의 죽음과 나의 죽음이 연결되는 장례 의식은 섬찟하면서도 숙연하다.
시간의 유한성을 구획하는 것이 죽음이고,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 시간이다.
석사학위논문을 다듬었다는 '2부 죽음의 해부'와 '3부 죽음 너머의 시간'은 죽음과 시간의 관계에 대해 철학자들의 죽음론을 바탕으로 변증법적인 종교적 상상력을 유형화한다. 즉,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다양한 종교적 상상력을 이해하는데 시간의 문제가 중요한 열쇠라는 거다. '죽음의 시간성'이라는 건데, 시간 너머에서 시간을 지배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흥미롭다. 예수의 죽음은 어떤가? 기독교 신학에서는 ‘에파팍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시간 속으로 들어온 종말이자 종말을 향해 튀어 나가는 시간이다.
삶은 생명의 자기실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삶은 생명에 심긴 죽음의 씨앗이 서서히 자라나는 과정, 즉 죽음의 자기실현이기도 하다. 353쪽
인간은 시간 개념을 통해 인간만의 죽음을 발견한다. 죽음과 시간의 복잡한 내적 관계는 인간에게만 드러나는 현상이며, 인간은 시간을 통해 죽음을 넘어선 시간의 차원, 즉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도약할 수 있다. 356쪽
우리가 죽은 자와 함께 형성하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의 존재를 파괴로부터 보호하는 일이다. 이 공동체는 내 존재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378쪽
근대적인 세계는 필멸성을 해체하지만, 근대 이후의 세계는 불멸성을 해체한다.
상당히 두터운 책인데도 동어반복이 아닌 연쇄적 논리에 의해 풀어가는 전개가 좋았다. 시간에 대한 사유와 죽음의 구원론 사이의 접점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아주 잘 문장에 스려 있었다. 현대 사회의 여전한 죽음의 허무주의, 즉 구원론적 시간성을 망각한 시간관을 넘어서기 위해 신화적 지향성의 회복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삶과 죽음의 실존적 의미가 새삼 깊이 있게 느껴졌다. 이 책은 죽은 이를 위한 레퀴엠이면서 시간 지평에서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나에 대한 울림이다. 죽음을 사색하는, 대단한 책이다.
천국도 부활도 저세상도 죽음 너머에 있지 않다.
정말 나이의 무게가 쌓일수록 과거는 무거워지고 미래는 가벼워진다. 어머니를 보내면서 삶과 죽음이 내게 주는 의미를 깊이 체감하고 있다. 삶의 순간순간에 언제라도 죽음의 침입이 틈을 엿본다. 나의 죽음 또한 가족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웰다잉이라는 말이 유행하지만 죽음은 언제나 부자연스럽고 폭력적이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죽음 너머를 지향'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일체유심조라 했으니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허상일지도 모른다. 삶 속에 부활이 있고 천국이 있다는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