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방송국의 [요즘 책방: 책 읽어드립니다]라는 'TV로 읽는 독서 수다' 프로그램에 『지리의 힘』이 소개되면서 사내 독서 모임에도 이 책이 추천되었습니다. 책을 받아놓고도 조금은 엉뚱한 이유로 얼른 읽지를 못했습니다. 가끔 들리는 블로그 쥔장이 아주 해박한 분이었던가 그러는데, 이분이 이 책을 사정없이 까내렸기에 그만 흥미를 잃어버렸던 겁니다. 문장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원본과 따져가며 비판을 하는데, "저자의 영문은 형편없고 싸가지가"가 없었고, "쌩양아치란 놈이 티비 나와서 떠들었나 보다"고 하시니 이 책을 읽는 저도 자칫하면 쌩양아치가 될 판이라는 느낌이 조금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좀 줏대가 없는 편인지라….
이리저리 미루다가 불면의 밤이 찾아왔을 때 밤을 새워 다 읽고 말았습니다. 마치 중고교 시절로 돌아가 재미있는 지리와 세계사 수업을 듣고 있는 듯 쉽게 읽혔습니다. 이 책의 내용 핵심은 세계사적 여러 현상이 우리가 사는 '땅', 즉 지리적 특성에 의한 지정학적인 유산이라는 겁니다. 그 옛날 중학 시절 칠판에 세계지도를 휙 그려놓고 몰입할 수밖에 없도록 설명해 나가시던 동문 선배 출신의 최** 선생님이 책을 덮는 순간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샘께서 이 책의 기본 맥과 같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거든요. 과거는 잊는 것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 묻혀 있는 거라더니, 그때가 언제인데 선생님의 존함과 함께 수업 내용이 떠오르네요.
우리의 삶은 언제나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 의해 형성돼 왔다. 전쟁, 권력, 정치는 물론이고 오늘날 거의 모든 지역에 사는 인간이 거둔 사회적 발전은 지리적 특성에 따라 이뤄졌다. (서문 9쪽)
저자는 '지금 전 세계에서는 [지리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라며 [세계 10개의 주요 지역]에 미치는 지리의 힘이 뭔지 풀어나갑니다. 중국이 왜 [해양 강국]을 꿈꾸는지, 미국이 지리적 축복과 [전략적 영토 구입]으로 세계 최강국이 된 배경, [이념적 분열]과 [지리적 분열]이 함께 감지되고 있는 서유럽, 가장 넓은 나라지만 [지리적 아킬레스건]을 가진 러시아, 그리고 [지리적 특성] 때문에 강대국들의 경유지가 된 한국,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는 일본, [지리의 감옥]에 갇힌 라틴 아메리카, 유럽인이 만들어 놓은 [지정학의 피해자]가 된 아프리카, 인위적인 국경선이 분쟁의 씨앗이 되는 중동, 지리적으로 출발부터 서로 달랐던 인도와 파키스탄, 21세기 경제 및 외교의 각축장이 된 북극이 주제입니다.
저자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몇몇 논점을 짚어보면, '중국인들은 티베트 문제를 인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기보다는 <지정학적 안보>의 틀에서 본다'는군요. 글로벌 패권을 놓고 다투는 G2의 용호상박 게임에서 바이든 정부는 전임 트럼프와는 다르게 무역보다는 인권을 들고 압박하는 모양새인지라 이 부분이 먼저 들어왔습니다. '남중국해 거의 전부를 자국의 영해로 표시해 놓고 있는 중국은 인접국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뜯어고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미국의 사고방식과 행동까지도 바꾸겠다는 심산'이랍니다. 중국에 유일한 위험은 중국 자신밖에 없다는 자신감, 좋죠…. 중국이 성공할 수 있다고 보는 이유가 14억 가지라면 미국을 넘어설 수 없는 이유도 14억 가지는 된다는 말이 와닿습니다.
러시아의 [지리적 감옥의 창살]은 부동항을 빗댄 말이네요. 해상 항로로 진출하는데 필요한 부동항이 여전히 부족하고 전시에 발트해와 북해 또는 흑해와 지중해를 거쳐 진출할 군사 능력 또한 부족하다는 겁니다. 북유럽평원만큼이나 부동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답니다. 러시아는 이런 지리적 약점이 있지만 그나마 석유와 천연가스 덕분에 버티고 있답니다. 왜 그렇게 호전이었나 싶었는데 1725년 표트르 1세가 남긴 충고를 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할 수 있다면 콘스탄티노플과 인도로 가까이 접근하라. 누가 되든 그곳을 통치하는 자야말로 세계의 진정한 통치자가 되리라. 그러므로 꾸준히 싸움을 도발하라." 어찌 우리의 이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쩝~
통일 한국을 바라지 않는 강대국이 어디 한 둘입니까 만,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루어내야 후손들의 영광스러운 미래가 있겠지요. 이 책에서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미, 중, 러, 일이 어떤 선택을 할지 짚어보고 있습니다. 주변국들도 모두 골치라는군요. 강대국들은 화약고가 터지는 것보다는 그냥 관리만 하는 쪽을 선호하는 듯합니다. 북한을 '연약한 것 같되 위험한 약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네요. 섬나라 일본이 군사적 개입을 고려한다는 대목과 중국과의 관련설은 머리가 지끈거리게 합니다.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무리 노력을 이어간다 해도 중국은 여전히 거기에 있을 것이며 이는 곧 미군의 제7함대도 도쿄만에 여전히 머물 것이라는 얘기'니까요.
이런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집니다. 부분적으로 세밀하게 따져보면 어떤 오류가 있을지 몰라도 '지리는 언제나 운명들을 가두었다'라는 대의는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1세기 후에도 러시아는 평원 너머의 서쪽을 여전히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고, 인도와 중국도 여전히 히말라야로 분리되어 있을 것이고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그 싸움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지리의 몫이라는 거지요. 물론 지리가 모든 사건의 방향을 지시하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미래에도 상당 부분 지리적 특성에 영향을 받을 건 분명해 보입니다.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은, 그냥 교양서적입니다. 하룻밤에 읽었으니 쉽게 쉽게 이해되었다고 봐야죠.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느낌으로 독후기를 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