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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의 눈을 달랜다

[도서] 시차의 눈을 달랜다

김경주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이 책에 실린 그의 첫 시를 펴고 나는 오래 전에 했던, 교과서에 밑줄긋고 주를 달고 같은 의미의 핵심시어를 연결하고 은유의 속뜻을 밝히는 등의 소위 말하는 시의 분석을 시도하고야 말았다. 방학중 학교 보충수업으로 현대시를 듣고 있던 아들아이가 '어 엄마도 이렇게 시를 읽네'라며 신기해했다. 첫 시를 읽어내고 뒤적 뒤적 이거 저거 앞뒤로 당기는 시를 찾아 헤매다 급기야 한동안 시집을 내려놓고 있었는데,  '나 참 뭔 말인지 모르겠네. 그래도 요즘엔 웬만하면 척척 이해가 잘 되더니...'라는 중얼거림을 옆에서 듣던 아이가 시집을 냉큼 받아 책 첫부분을 들쳐보고 한 말이었다. 

                     너도 곧' 네 피속으로 뛰어든 ' 보게 될거야

라는 제목의 이 첫 시는 시인이 이 시집의 대문에 준비한 초대장같은 글이다.
너무 노골적인 어투에 비하면 어휘들은 어떻게 하면 숨바꼭질을 잘해볼까하는 듯 마냥 비켜가기를 시도하고 있다.

나는 욕조에 눈을 담아 끓이는 계절태어났습니다 / 나의 눈에서 태어난 눈들은 모두 내가 태어난 계절 들이 되었을 겁니다 어쩐지 나는 자기 눈을 번식하기 위해 / 태어난 사람같습니다 그게 나의 궁리라면 / 나의 욕조는 "따스한 물로 커다란 거울을 안고 들어가 / 거울 속으로 사라져 버린 날기후"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 그게 당신의 방이라면 당신의 방에는 / 분명 처음보는 욕조 있을 겁니다
 
처음에 나는 이 시인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없었다. 그의 이전의 시들을 읽어본 적도 없었다. 단지 간단한 이력과 그의 얼굴 사진이 있는 인물검색난에서 그를 잠깐 스쳤을 뿐이었다. 그런데 김수영문학상 수상이란 문구가 기억에 남았고 김수영 시인의 번뜩이는 시적 울림을 이 시인의 시에서도 찾을 수 있으리란 기대감이 있었다.  첫 시에서 만난 이 시인의 언어가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작정 교훈적으로 해석하기를 즐기는 나쁜 버릇때문에  나는 이 시 역시 제법 그럴싸한 고상한 해석으로 쉽게 넘어가 버렸다. 말하자면 그가 말하는 네 피속으로 뛰어든 새라든가, 눈을 번식시킨다든가, 처음보는 욕조라든가 하는 말들을 이 작가가 좋아한다는 '여행의 시간' 즉 자아성찰의 시간, 자신과 세상을 보는 범상치 않은 시인의 시선, 여행을 통한 충만한 기쁨, 자기반성, 새로운 의지형성 등 고리타분한 일상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처음보는 욕조'를 다시 한번 "처음엔 좀 낯설더라도 당신의 삶을 바꾸어 줄 그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이 시인 역시 새의 이미지를 즐기는구나하면서...


그런데 막상 다음에 이어진 시들을 마음에 끌어당기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먼저 섣불리 정의내린 말들이 부정확해진 데 대한 꺼림직함이 더욱 나를 방황하게 만드는 것이다. 책 뒤의 해설을 읽고 역시 나의 속단을 반성했지만 해설역시 만족스런 답을 주지는 못했다.

어찌되었건 나는 그의 표현이 썩 좋다. 자고 일어나면 입술위에 쌓이는 먼지 / 이방에서 저 방으로 옮기는 데에도 기억은 수십종의 식물을 달고산다 /  많은 문장을 매장하고 있는 창문일수록 인간의 입김이 진하게 묻어있는 것처럼/ 나는 해마다 숲에가서 버려진 피아노를 두들기다 손목의 시계를 몰래 숨기고 오는 소년이 되었다 /  길에서 주운 이어폰 속 누군가의 귀 냄새를 발표하는 한 여름의 청탁시 같은 것 /  내 욕조의 입장권 /  저는 어젯밤꿈에 고래가 마당에 와서 내 눈사람을 꿀꺽 삼키는 것을 보았어요 / 시때문에 울먹이는 일 좀 없었으면 하는데 하루도 새가 떨어지지 않는 날이 없다

 "우리가 접었던 무수한 종이 비행기가 만들어 내던 '시차'는 우리가 무언가 다른 언어로 말하고 싶었던 순간의, 다른 언어가 필요했던, 어디론가 부유해가는 순간의 '착시'같은 것일지 모른다." 그가 말하는 시차란 시간을 역행할 수 없는 물리적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시인의 감수성이 아닐까. 어린 시절의 아득하지만 선명한 한 시간의 자락들, 평범하지만 곧 멀리 지나간 뒤에는 붙잡히지 않는 투명한 정신의 시간들이 그가 말하는 시차일 것이다. 삶의 순간에  나를 끌고가는 기억의 편린들, 나라는 존재를 존재답게 만들었던 소중한 순간들을 우리는 놓치고 싶지 않다. 나는 시인 김경주의 안내로 나의 방에서 처음보는 욕조를 보았다. 아니 나역시 원래 그런 욕조가 내 가슴속에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감은 눈의 속눈썹이 간지럽다는 걸 모르고 있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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