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콘텐츠 바로가기
- 본문 바로가기
기본 카테고리
거대한 반죽 뻘은 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
헌화가
2005.03.02
댓글 수
0
어른보다 생명의 근원에 더 가까운 아기의 살결은 얼마나 부드럽고 빛나는지 보기만 하면 손을 대고 싶어합니다. 투명하기조차 한 아기 살결을 만지고 싶어하는 것은 아름다운 꽃을 보았을 때 가까이 하고 싶어하는 마음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본능으로 좋아하며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생명의 본질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기와 꽃과 같은 존재에게서 생명의 본질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름다운 꽃 같은 존재인 아기는 부드럽고 동글동글하여 말소리조차 옹알옹알 부드럽고 동그랗습니다. 모름지기 생명은 부드러움과 동글동글함에 가깝습니다. 생명의 물질을 이루는 요소들은 어떤지요. 물은 부드럽게 흐르고 공기는 둥근 가벼움이며, 흙은 보들보들하고 불은 솟구치는 유연함입니다. 네 요소 모두 부드러움과 동글동글함에 가깝습니다.
생명의 본질이 부드러움과 동글동글함에 가깝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어떤지요. 부드러움과 동글동글함과는 거리가 먼, 직각이 이루는 딱딱함이 아닌지요. 도시 생활 역시 ‘길이 길을 넘어가는 육교 바닥도 / 척척 접히는 계단 길 에스컬레이터도 / 아파트 난간도, 버스 손잡이도, 컴퓨터 자판도 / 빵을 찍는 포크처럼 딱딱하다 // 메주 띄울 못 하나 박을 수 없는 / 쇠기둥 콘크리트 벽안에서 / 딱딱하고 뜨거워지는 공기를 / 사람들이 가쁜 호흡으로 주무르고 있’(「감촉여행」)습니다. 부드럽고 둥근 생명이 감히 발붙이기 어려운 공간, 차라리 반생명의 공간이 도시입니다. 그리하여 직각이 이루는 딱딱한 ‘도시에서의 삶이란 벼랑을 쌓아올리는 일’(「옥탑방」)이고, 끝내 ‘온 세상은 하나의 탑이 되’(「김포평야」)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도시가 점점 더 딱딱해지고 반생명의 길을 걷고 있다면 새로운 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요. 시인은 이미 그 길에서 온몸으로 살며 시로써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시인은 ‘낯설지 않은 도시를 떠돌다 / 낯선 고향’(「귀향」) 같은 바닷가에 닻을 내렸습니다. 그곳에서 점점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을 멀리한 채 바닷가 움막에 살며 바닷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치망에 걸린 물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기도 하고, 숭어 한 지게 짊어지고 맨발로 지구를 신기도 하며, 그물에 줄줄이 딸려 오는 주꾸미를 배 위로 끌어올리기도 합니다. 시인은 그러한 생활 속에서 뻘밭의 ‘부드러움 속엔 집들이 참 많기도 하’(「뻘밭」)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내 뻘의 말랑말랑한 힘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다다릅니다. 기실 그곳에 생명의 길이 있었습니다.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
쉽게 만들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물컹물컹한 말씀이다
수천 수만 년 밤낮으로
조금 무쉬 한물 두물 사리
소금물 다시 잡으며
반죽을 개고 또 개는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함무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
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
그렇지만 ‘들이 아닌 강이 아닌 산이 아닌 / 식당에서나 음식물을 만나 / 죽은 고기를 씹고 / 똥을 내리는 물소리나 들으며’(「귀향」) 사는 도시는 이 시대의 대세입니다. ‘더운 곳에 물을 대며 / 살아가던 농촌에도 / 딱딱한 건물들이 들어’ (「감촉여행」)서 도시를 흉내냅니다. 그러니 도시에서 볼 때 농촌이나 어촌 같은 시골은 어서 빨리 도시화가 이루어져야 할 도시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럴지도 모를 일입니다. 시골은 도시의 그림자이고, ‘검은 그림자들이 줄줄이 서 있’(「불 탄 산」)는 불 탄 산 같은 곳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 죽음의 그림자일 뿐’(「질긴 그림자」)이고, ‘그림자가 그림자 먹어 치우는 것’(「고향」)이 우리 인생일지도 모릅니다. 점점 딱딱해지는 세상을 완전히 외면할 수 없이 여자 몸 속에 아이 하나 못 심고 마흔을 넘긴 시인이 거대한 부드러움 속에 있기에 더욱 그걸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세상을 보는 눈은 흐릿하거나 어둡지만은 않습니다. 더러운 호수가 하얀 연꽃을 피우듯 시인은 그림자로부터 일찍이 보지 못한 세상을 꽃피웁니다. 금방 시드는 꽃 그림자에 색깔의 수를 놓고, 어머니 휜 허리 그림자를 우둑둑 펴게 하며, 육교에 엎드린 걸인의 그림자를 따뜻하게 하고, 마음의 그림자에 평평한 세상을 세웁니다. 그 어느 세상보다 값지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바닷가 사람들과 더불어 가난하게 살며 뻘에서 피워낸 아름다운 세상이기에 감정의 동요 없이는 바라볼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리하여 ‘함민복은 우리 시대의 축복이다’는 후배 시인 박형준의 찬사는 너무 평이한 수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림자
금방 시드는 꽃 그림자만이라도 색깔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 허리 휜 그림자 우두둑 펼쳐졌으면 좋겠다
찬 육교에 엎드린 걸인의 그림자 따뜻했으면 좋겠다
마음엔 평평한 세상이 와 그림자 없었으면 좋겠다
PYBLOGWE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