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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도서]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이치조 미사키 저/권영주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선행성 기억상실증(先行性記憶喪失症)이라는 용어를 처음 알게 되었다. 전향성 건망증(前向性健忘症)이라고도 하는데 대뇌의 해마가 손상되어 새로 겪는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 질병을 말한다. 인간의 기억은 '단기 기억''장기 기억'으로 나누는데, 선행성 기억상실증은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바꾸지 못하면서 생기는 병이다. 술을 많이 마셔서 '필름이 끊긴' 경우가 있는데 이때가 바로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다. 술을 많이 마시면 해마가 잠시 마비되어서 단기 기억이 저장되지 않아 일시적으로 선행성 기억상실증 같은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날마다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는 소녀가 있다. 고등학교 2학년인 히노 마오리가 바로 주인공이다. 그러니까 히노는 고등학교 2학년까지 기억에 머물고 있고 날마다 새로운 날을 맞는다. 바로 그날 밤에 잊어버리는 나날이다. 기억이 쌓이지 않기에 어떠한 시도도 할 수 없는 히노에게 동급생 가미야 도루가 고백한다.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를 돕기 위해 나섰다가 거짓 고백을 하게 된 것인데 히노는 세 가지 조건을 내걸고 고백을 받아들인다. “첫째, 학교 끝날 때까지 서로 말 걸지 말 것. 둘째, 연락은 되도록 짧게 할 것. 셋째, 날 정말로 좋아하지 말 것.” 히노가 조건부 고백을 받아들이고 도루가 이행하면서 둘의 유사 연애는 시작된다. 정말로 좋아하지 말라는 세 번째 유사 연애는 금방 정말로 좋아하는 진짜 연애로 바뀐다.

 

기억상실에 걸린 비극의 여주인공 이야기는 너무 진부하다. 비극으로 끝나는 결말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러니 소설을 계속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는 고민이 생긴다. 그러나 뻔한 이야기라고 단정하면서도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게 무엇일까. 선한 인물들의 힘에서 찾을 수 있겠다. 식구를 꼼꼼하게 챙기면서도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는 히노를 위해 자신이 잊히는 것까지 기꺼이 선택하는 도루의 지극한 사랑, 선행성 기억상실증 기간에 쌓였다가 지워진 도루에 관해 온몸으로 기억하려고 애쓰는 히노의 애절한 사랑, 히노와 도루의 온전한 사랑을 위해 기꺼이 뒷배경이 되려고 하는 친구 와타야의 헌신, 그리고 소설가의 길을 찾아가는 도루의 누나까지.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는 듯한 도루의 말이 깊이 다가온다.

 

인간은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렇잖아, 굉장하지 않아? 공업 제품이랑은 다르다고. 거기엔 설계도도, 숙련된 작업자도 없어. 어머니 배 속에서 자라서 세상에 툭 나와서, 그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살아 있지. 그건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로봇처럼 설계도를 바탕으로 만든 게 아니니까 이상이 생겨도 바로 모르고 움직이지 않아도 부품을 교체해 살려낼 수 있는 것도 아냐. 어떻게 이렇게 살아 있는 건지 실은 잘 알 수 없어. 이해할 수 없고, 굉장하고, 동시에 겁나는 일이야.”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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