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든 그렇겠지만 과거에 비하여 요즈음 직장 분위기에 많은 변화가 있음을 느끼곤 한다. 수평적인 관계를 강조하면서 직급도 하나의 호칭으로 통일하면서 근무 시간 역시 상당히 유연하게 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과거에는 상사의 눈치를 보면서 퇴근을 해야했고, 야근은 조직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이자 개인 능력의 판단 지표로 활용되었으니 밥먹듯이 야근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으며, 휴일은 물론 연차까지 사용하지 않으며 특근 근무를 자청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이제 노동법에 의하여 거의 사라졌으며, 연차마저도 오히려 회사에서는 워라밸을 강조하면서 강제적으로 사용하는 상황이니 그 변화를 이제는 몸소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상사 중 일부는 과거의 그러한 향수(?)에 젖어 직원을 압박하는 경우가 여전히 존재하는데, 육아휴직을 쓰거나 야근을 적게 하면 인사고과를 나쁘게 주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러한 압박과 괴롭힘은 과거와는 달리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직장 분위기는 변화가 필요하다.
[해러스먼트 게임]은 바로 직장 내의 괴롭힘을 소재로 하고 있다. '해러스먼트(harassment)'는 일반적으로는 괴롭힘, 학대를 뜻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주로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종류의 괴롭힘을 가리키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은밀히 이루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해러스먼트를 다루고 있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이 작품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아마 이 작품을 읽는다면 속으로 뜨끔하거나 또는 통쾌함을 느끼는 두 부류로 나뉘어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이야기의 시작은 지방으로 좌천되어 소도시에서 점장으로 일하고 있던 아키쓰 와타루가 갑자기 마루오 홀딩스 본사의 컨플라이언스실 실장으로 발령되는 것에서 비롯된다. 흥미롭게도 아키쓰는 부하직원의 직장 내 고발을 통하여 좌천되었기 때문에 그가 컨플라이언스 실장이 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사실 사장 역시 바로 아키쓰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서 지방으로 좌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인물이기에 이러한 인사배치는 아키쓰 입장에서 충분히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실제 사장은 아키쓰에게 거래를 제안하는데, 그가 와키타 상무의 비위 행위를 적발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와키타 상무는 바로 일전에 아키쓰의 부하직원으로서 아키쓰를 내부고발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관계는 묘하게 진행된다. 아키쓰의 입장에서는 이제 회사의 실세가 되어 사장 자리를 위협하는 와키타와 자신을 내쫓았던 마루오 사장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컨플라이언스 실장으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속내를 감추고 아키쓰는 유일한 컨플라이언스실 직원인 다카무라 마코토와 함께 다양한 해러스먼트를 처리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아키쓰야말로 부하 직원에 대한 파워 해러스먼트로 좌천된 이력이 있기에 그의 활동은 다소 모순처럼 보여지지만, 여러 에피소드를 통하여 드러나는 그의 행위는 당시 부하직원이었던 와키타 상무와의 갈등에 의하여 빚어진 것이었기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아키쓰와 와카루의 관계 대립은 점점 심화된다. 그 와중에 마코토와 함께 소비자에 의한 불만에서부터 여성 간부의 배치에 대한 내부 불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해러스먼트를 처리하는 과정은 우리로서도 충분히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어서 이내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특히 육아를 이유로 단축근무제를 활용하는 직원의 이야기가 상당히 눈길을 끌었다. 왜냐하면 점점 출산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한국에서도 기업에 육아휴직은 물론 육아를 배려한 단축근무제가 법적으로 정비되면서 많은 기업들이 그것을 따라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정해진 시간에 퇴근을 하는 남자직원은 정해진 규정에 따라서 그 제도를 활용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은 따갑기만하다. 사실 그 남자직원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육아를 병행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상사로부터 아예 회사를 관두라는 폭언을 받게 된다. 아키쓰와 마코토는 우선 폭언을 한 상사를 파워 해러스먼트, 즉 직장 내 상사의 괴롭힘으로 규정하면서 해당 상사에 대하여 제재를 가하려고 하지만, 상사 역시 모두 바쁜 상황 속에서 그것을 외면하는 부하직원에 대한 분노는 오히려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되물으며 항변한다.
이 대목에서 꽤 많은 생각과 함께 직장생활을 돌아보게 된다. 과거에는 육아휴직을 쓴다는 것은 퇴사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이제 육아휴직이 법적으로 제대로 정비되면서 그러한 일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그들에 대한 불이익은 존재한다. 바로 인사고과를 나쁘게 주는 것으로 말이다. 물론 육아휴직자로 인하여 남은 사람들의 업무 부담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기에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지만, 애초 육아휴직의 취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어쩌면 제도만 도입하고 그에 따른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는 회사 시스템에도 문제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즉, 휴직자가 발생하면 인원을 보충해야 하는데, 휴직은 법적으로 보장하여 받아주지만 이후 조치가 없으니 남아있는 사람들로서는 충분히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또 다른 형태의 해러스먼트를 야기하고 있지만, 아마 한국의 대부분의 직장에서는 그에 대하여 별다른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니 법으로 보장된 육아휴직을 쓰는 사람도, 또 남아있는 사람 모두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작품도 너무나 현실적이기에 아키쓰와 마코토는 육아를 위한 남자직원의 그 선택에 대한 비밀을 파헤치는 것까지는 가능했지만, 이 작품에서도 그러한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은 따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 인재를 발탁하는 부분 역시 현실적이다. 과거보다는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성들이 진급하고 주요 보직을 맡는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 업무에 여성이 배치되면 엄청난 홍보를 하는 것은 거꾸로 그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그러한 홍보 과정을 거쳐서 부임한 여성 상사가 부서원 전체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으니 이 또한 낯선 현실은 아니라 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이러한 성별의 차이는 물론 새로 발탁되어 임무를 맡게 된다면 기존 조직원과의 갈등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었고, 이로 인하여 업무상 많은 차질을 빚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는 위로부터의 괴롭힘이 아니라 거꾸로 아래로부터의 괴롭힘이기에 해러스먼트라는 것이 하나로 특정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아키쓰의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그 이야기 자체는 물론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해러스먼트는 직장에서 우리 역시 얼마든지 목격되는 것이고, 심지어 그러한 괴롭힘을 경험한 적이 있기에 누구라도 과몰입하여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 역시 중간 관리자로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러한 괴롭힘을 어느 정도 경험하였기에 이 작품을 통하여 직장의 문제점을 돌아보는 시간도 가져보게 된다. 그리고, 행여나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 해러스먼트가 될 수 있음도 다시 한번 배울 수 있었다. 아, 그리고 꽤 인상적인 문구가 있었는데, 그것은 해러스먼트에 대한 아키쓰의 혼잣말이었다.
"이럴 때 파워하라(파워 해러스먼트의 일본식 표현)나 성희롱은 편리해. 그만두게 만들 대의명분이 되니까. 해러스먼트도 참 각양각색이야."
- p. 12 中에서 -
해러스먼트 그 자체는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이것을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회사 또는 직원으로 인하여 또다른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한 공간에서 비슷한 일을 하기 때문에 직장 상사나 동료, 부하직원에 대하여 동질감을 느낄 때가 많았지만, 요즈음은 그 동질감이 착각에 가깝다는 생각도 적잖이 하게 된다. 동질감은 비슷한 전공과 일을 하는 것이 전부이지 인성과 도덕은 비록 한 공간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회사에서는 실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다양한 사건과 사고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해러스먼트로 인하여 또 그 발생한 해러스먼트를 이용하여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무심코 내뱉은 아키쓰의 그 말이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