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태생으로 홍콩은 물론 타이완과 일본에서도 추리작가로서 유명한 찬호께이는 적어도 나에게는 생소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주로 읽는 추리소설은 대부분 영미권 또는 일본이 대부분이기에 홍콩을 배경으로 한 그의 작품은 낯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오게네스 변주곡]을 읽어보고 싶었다. '변주곡'이 주제를 설정하여 그것을 여러가지로 변형하는 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 책에 수록된 다양한 작품들은 결국 찬호께이라는 작가를 알아가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을테니 말이다. 모차르트의 K. 265는 변주곡인데, 아마 들어보면 모두가 '아! ~~'라는 감탄사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반짝 반짝 작은별~"의 멜로디를 무려 12개의 변주곡으로 구성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오게네스 변주곡]의 책장을 덮을 무렵에는 나 역시 찬호께이에 대하여 좀 더 익숙해지지 않을까?
한 권의 책에 무려 14개의 작품과 3개의 습작이 포함되어 있다. 책과의 만남으로 작가를 알아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장편을 통하여 작가에게 보다 깊이있는 접근을 원하는 경우도 있고, 이처럼 다양한 단편들을 통하여 작가를 알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후자에 해당되는데, 워낙에 생소한 작가 또 낯선 홍콩의 문학을 이해하기에 더없이 적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각각의 작품에 대한 깊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우려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이 책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흥미로운 점은 '변주곡'이라는 제목이 클래식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각각의 작품에 쇼팽과 리스트 등의 곡들을 매칭시키고 있는 점이다. 심지어 그의 3편의 습작은 아예 '에튀드(연주기교의 연습용 곡)'를 곁들이고 있으니 각각의 음악이 그의 작품과 어떻게 어울리는지를 느껴보는 것도 이채롭다.
◆ [파랑을 엿보는 파랑]
☞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는 유능한 인물이지만,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주인공에서 사이코패스의 향기가 묻어난다. 그는 블로그를 통하여 한 여자의 삶을 엿보고 있다. 마치 일기와 같은 그녀의 블로그를 읽으면서 그는 묘한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다크넷에서 위험한 살인에 대한 게시판을 보는 그의 모습과 여자를 살해하는 주인공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익숙한 흐름은 반전이 있다. 그 반전 속에는 사이코패스와 보통 사람에 대한 작가의 신념도 포함되어 있기에 단순하다고는 할 수 없다. 찬호께이의 명성이 과장이 아님이 느껴진다.
◆ [시간이 곧 금]
☞ 시간을 사고 팔 수 있다는 소재 역시 참신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인간의 수명을 돈으로 거래하는 [인 타임]이라는 영화도 있으니 말이다. 찬호께이는 '시간은 금이다'라는 격언과 함께 이 작품에 시간의 중요성을 내재화하였다. 사실 이런 시도 역시 독창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시간을 사고 팔 수 있다는 SF적인 설정에서 시간을 쉽게 파는 자와 어렵게 사는 자에 대한 결과는 작품 도입부에 언급한 시간의 중요성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어려운 순간을 통째로 날리면서 얻은 돈으로 성공을 꿈꾼 이와 단 5분을 구매하여 그것을 활용한 사람의 이야기는 시간은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으니까.
◆ [추리소설가의 등단 살인]
☞ 추리소설을 읽다보면 어떻게 그토록 기발하고 생생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지 감탄할 때가 있다. 추리소설가를 꿈꾸는 젊은 작가는 출판사 편집인으로부터 진정한 추리소설가가 되기 위해서는 직접 살인을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실제 유명 추리소설가 역시 그 과정을 거쳤다고 넌지시 암시하면서 말이다. 이 비정상적인 조언은 우연히 서점에서 추리소설을 무시하는 한 여자를 목격하면서 사건으로 이어진다. 완벽한 밀실살인으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그것을 소설로 쓰려고 했던 것이다.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밀실살인 사건과 그에 대한 반전, 그 와중에 추리소설가의 창작에 대한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는 이 작품은 마치 장편을 압축하여 추리소설은 이렇게 쓰여진다라는 예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설마 오늘날 유명한 작가들이 살인을 저지른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 [가라 행성 제9호 사건]
☞ 변주곡이라는 관점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SF와 추리라는 형식이 변형 적용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삶의 공간을 확장하기 위하여 우주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그룹과 다른 종족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그룹의 대립은 그 형식은 SF적이지만, 개발과 관련된 오늘날 다양한 갈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이 와중에 새롭게 발견한 행성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탐사선 폭발이 발생하고, 이것은 곧 살인사건으로 비화되면서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하여 미래 사회에서는 이미 보기가 어려운 탐정이 등장한다. 사건 해결 과정도 흥미롭지만, 인간의 이익을 위한 그 과정에서 희생된 하등 생물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SF와 추리가 단순히 재미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토록 짧은 분량에 그러한 것을 모두 담아낸 저자의 필력에 그저 감탄하게 될 뿐이다.
◆ [영혼을 보는 눈]
☞ 일을 마친 한 남자가 담배를 피다가 노숙자와 같은 모양새를 한 노인과 마주하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남자가 건낸 담배를 함께 피우면서 자신은 영혼을 볼 수 있다고 하는 노인은 과거 영매로서 유명세를 떨쳤다고 한다. 그에게는 죽은 영혼이 보였는데, 살인 현장에서 피해자의 영혼이 지목하는 범인을 경찰과 함께 잡는 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말을 할 수 없는 영혼의 의도를 완벽하게 해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노인은 실수로 영혼의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여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실수를 하고 이후 사람들에게 잊혀지게 된다. 그래서, 노인은 이제 분명 살해된 자의 영혼이 보이면서도 애써 외면한다. 그리고, 남자와 헤어지면서 노인은 잠시 머뭇거린다. 젊은 남자의 뒤에 기괴한 형상을 한 영혼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찌 된 일일까?
◆ [숨어 있는 X]
☞ 예전 MT를 가면 친구들과 '마피아 게임'을 하곤 하였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엎드린 상황에서 사회자가 마피아를 2~3명 정도 지정하고 이들끼리 서로의 존재를 아는 상황에서 이제 시민들이 마피아를 찾는 게임이다. 그런데, 이 게임은 생각해보면 마피아를 잡기 위한 아무런 단서가 없다. 물론 자신은 마피아가 아니면서 누가 의심된다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과정에서 의심스러운 표정이나 동작으로 찾긴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사실 마피아를 잡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마피아 중 한 명이 진짜 마피아를 지목하면 이후 사람들은 마피아를 잡은 그 사람을 믿게 된다. 정작 그도 마피아인데 말이다. '숨어 있는 X' 역시 비슷한 구조이다. 추리소설을 배우는 대학의 한 교양 과목에서 교수는 수업에 참여한 학생 7명에게 제안한다. 그들 중에는 학생을 가장한 조교가 있는데, 그를 찾는다면 따로 그 수업을 듣지 않아도 A학점을 준다고 말한다. 이제 학생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또 경쟁자로 여기면서 X를 찾기 위한 여정에 돌입한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 중에서 아마 분량이 가장 많고, 좀 복잡한 과정도 있지만 논리적으로 X를 찾는 과정은 마치 추리소설을 직접 체험하는 재미가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5개의 작품을 추려보았는데, 이외에도 분량상 리뷰에 담지 못한 흥미로운 작품들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단편, 심지어 4~5페이지로 구성된 너무나 짧은 이야기도 있지만, 참호께이의 필력을 확인하기에는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짧은 분량 속에서도 추리소설이 주는 긴장과 반전에 다른 갈등 해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SF와 같은 장르간의 혼합을 통한 색다른 분위기의 작품들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몇몇 작품들은 단순히 재미와 흥미에만 그치지 않는다. 행간에 담긴 그 의미는 우리로서는 꽤 생각해 볼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디오게네스 변주곡]은 생소했던 찬호께이의 작품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 작품들에 만족을 느꼈다면 이제는 그가 들려주는 변주곡이 아니라 교향곡도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