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A. 패리스의 네 번째 작품인 [딜레마]가 출간되었다. 그녀의 이전 작품인 [비하인드 도어]와 [브레이크 다운]에서는 부부라는 가까운 관계에서 벌어진 잔혹한 사건을 다루었다면 이번 작품은 한 가족에 일어난 비극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부부의 치밀한 심리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차이가 있다. 특히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 부부에게 예정된 파국이 무엇인지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B. A. 패리스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 부부의 교차되는 시선과 심리 묘사를 시간대별로 나누어서 단 하루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결말에 이르기까지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 바로 이 작품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학생 시절 덜컥 아이를 갖는 바람에 일찍 결혼하여 어려움을 겪었지만, 리비아의 마흔 살 생일 파티를 앞두고 있는 애덤과 리비아 부부는 꽤 안정된 상황인 것처럼 보여진다. 제대로 결혼식도 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리비아가 자신의 마흔 살 생일 파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은 시작부터 이들 가정에 파국이 예정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들 가정의 균열이 하나 둘씩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무로 가구를 제작하는 일을 하면서 꽤 성공을 거둔 애덤과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여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는 리비아, 곧 대학 석사 과정을 마치는 아들 조시와 홍콩에서 유학 생활을 하는 딸 마니를 보면 전형적인 중산층의 평범한 가정처럼 보인다. 하지만 리비아가 조시를 낳은 상황에서 애덤은 그 예상치 못한 결혼과 아들로 인하여 자신이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하였기에 그에 대한 원망을 가끔 아내와 조시에게 드러냈으며, 아내와 아들 역시 그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부분에서 서먹함이 있었다. 하지만 리비아의 파티를 목전에 앞두고 정작 딸 마니로 인하여 애덤과 리비아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남편도 그 사실을 알았어야 했는데. 처음으로 마니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을 6주 전에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할 이유가 너무 많았다. (중략) 하지만 가장 적절하게 전달할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기에 딱 거기서 멈추었다. 고통스럽지만 차근차근 천천히 말하는 게 가차 없이 내뱉어버리는 것보다 덜 괴로울까, 아닐까. 어느 쪽이든 남편은 엄청난 충격을 받겠지.
- p. 30 中에서 -
아내인 리비아가 마니에 대하여 알게 된 사실이 무엇이길래 그녀는 파티 당일까지 계속 고민했던 것일까? 유난히 딸을 사랑하던 남편이 큰 충격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리비아는 자신이 알게 된 마니에 관한 비밀을 털어놓지 못한다. 이러한 딜레마를 안고 있던 리비아는 마침 마니가 시험 공부 때문에 자신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기 어렵다는 연락을 받고, 내심 마니가 파티에 오지 않는 것에 안도하게 된다.
반대로 남편인 애덤은 마니로부터 엄마 몰래 생일 파티에 참석하여 엄마를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마니는 홍콩에서 영국까지 카이로와 암스테르담을 경유하여 오겠다고 애덤에게 연락하였으며, 애덤 역시 마니의 깜짝 계획에 동참하게 된다. 하지만 애덤은 혼자 알고 있던 마니의 계획으로 인하여 이후 뜻하지 않게 발생된 사건을 알게 되면서 그 역시 심각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지금이 아내가 진정 행복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일지 모른다는 생각만 들었다. 만일 마니가 잘못된다면 미래에, 아주 먼 미래에 아내가 과거를 잊는 순간도 있겠지. 하지만 남은 평생 매 순간, 매분, 매시간 극심한 슬픔의 고통을 느끼겠지. 내 대답을 기다리며 서 있는 아내를 보면서 지금이 아내가 행복을 느낄 마지막 순간일지 모른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 순간을 연장시켰다. 대답에 뜸을 들이며 시간을 몇 초 더 늘렸다.
“여보! 나중에 해도 될까?”
- p. 180 中에서 -
애덤과 리비아는 각각 서로 다른 마니에 대한 비밀에 대한 딜레마를 선뜻 공유하지 못한다. 분명 부부가 마니의 비밀을 공유하여 그 문제를 서로 해결하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행복에 대한 배려를 이유로 공유하지 않음으로써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리비아의 마흔 살 생일은 그동안 부부가 어렵게 결혼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제 행복하고 안정된 가정을 이루었음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그 행복의 순간을 마니에 대한 문제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둘 중 누구 하나라도 좀 더 일찍 그 딜레마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았다면 이들 부부는 그 비극을 마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 가정에 찾아온 파국은 실로 비극적이다. 특히 그 파국이 부부의 행복에 대한 서로의 배려로 인하여 벌어졌다는 점에서 그 충격은 더욱 컸다. 솔직히 나로서는 이들 부부가 딜레마를 두고 고민하는 과정이 쉽게 와닿지는 않는다. 딸의 그 충격적인 비밀을 알고도 과연 자신이 그토록 염원하던 생일 파티를 꼭 진행해야 했을까? 또한 애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마니에게 벌어진 일을 알아봤다면 본격적으로 생일 파티가 시작되기 전에 확실하게 입장을 정리할 수 있었을텐데 굳이 최악의 상황에 대해서는 외면해 버린 그의 모호한 입장이 그다지 공감이 되지 않는다. 가족에 대한 미묘한 동서양의 입장 차이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딜레마]는 B. A. 패리스의 이전 작품에 비한다면 스릴이나 반전이라는 측면은 그리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혹시나 애덤과 리비아가 알고 있던 마니의 비밀에 대한 반전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결말에 이르기까지 쉽게 떨쳐낼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이 작품은 가정 구성원에 대한 배려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다양한 문제점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한 것에 더 의미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나는 애덤과 리비아의 딜레마가 서로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 100% 공감할 수 없지만, 현실 속에서도 가족에 대한 서로의 배려라는 이유로 행해지는 것을 타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평상시의 논리적인 관점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비이성적인 행위가 가족이라는 범주 안에서는 심심찮게 일어나며 심지어 그것이 서로를 위하거나 배려하는 행위로 간주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함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의 포인트가 아닐까?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