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7.월
[나를 위로하는 그림] 속 문장
문장수집을 위한 카테고리를 만들어 놓은건데..
옮기다 보니 문장이 아니라 문단이네요.
글 하나하나가 너무나 좋았던 그래서 읽고 또 읽어도, 읽을때마다 내 맘을 살살 건드려 주는 작가의 글이 너무 좋다.
리뷰에 담지 못하고 독서노트에도 다 옮겨적을 수 없어서... 내가 보려고 옮긴거니까..
욕하지 마세욥~!!!
슬픔을 세탁하다.
웃을 수 없는 날의 연속이다. 그렇다고 눈물도 나지 않으니 그저 아플뿐이다. 사람의 슬픔이란 깊고도 혼곤하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슬픔의 흕거을 지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 그럴 때 내가 습관적으로 하는 것이 빨래다. 슬픔을 털어내는 행위로 빨래만한 게 없는 것 같다. 마구 뒤엉켜 있는 빨래더미에서 옷을 하나씩 솎아내 종류별로 분리하듯 내 안에 복잡한 갑정들을 유심히 살피며 슬픔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하려 애써본다. (...) 몇 차례 깨끗이 헹구고 물기를 꽉 짜내 탁탁 털어낸 후 빨래를 하나씩 널다 보면 삽상한 감정이 느껴진다. 따스한 햇볕에 빨래가 말라가듯 내 안의 슬픔도 이내 마르기를 바라본다.(33쪽)
그녀에게 빨래는 냉혹한 현실에 치여 지치고 닳아버린 마음을 환기시키고 정화하는 매개체다. 답답하고 옥죄는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옥상에서 빨래를 널며 오랫동안 뒤집어 쓰고 있던 일상의 매캐한 먼지들을 탈탈 털어버린다. 조금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우울한 기분을 날려주고, 마음과 몸에 달라붙어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삶의 고단함과 마음속 슬픔들을 쉬이 날려버린다.
(38쪽)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
마음이 에스프레소 맛이다.
그런 날이 있다. 농축된 쓴맛이 입안에 계속 맴도는 날. 느닷없이 찾아오는 불안에는 항상 속수무책이다. 알 수 없는 마음이 괴롭힐 때마다 찾는 것은 언제나 커피다. 커피는 우리가 더 이상 고립되거나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책이다.(...) 커피가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되는 존재임은 분명한 것 같다.(47쪽)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 불안한 마음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그윽한 커피 향이 고요가 되어 혀끝에 닿는다. 기분 좋은 쓴맛이 나면서도 상큼한 신맛이 받쳐주고 여기에 단맛의 여운까지 감도니 마음이 평온해진다. 마음에서 들리는 평화로운 소리를 들으며 느긋함을 즐기는 이 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향긋한 커피 향에 취해 있던 그때, 느닷없이 창밖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커피는 어떤 날씨, 어떤 공기, 어떤 마음과도 잘 어울리지만 비 오는 날에는 거의 필수적으로 간절하게 커피 생각이 난다. 커피 한잔의 따스한 기운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커피향이 그윽하게 다가오는 비 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빈센초 이로리(1860-1949)의 <창가에서>이다. 이탈리아 화가 빈센초 이로리가 비 오는 날에 커피 마시는 여인을 그린 것으로, 고요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작품이다.(48쪽)
책이 주는 달콤한 평온
그렇게 미친듯이 책에 빠져 지냈던 이유는 아마 세상에 대한 답을 책속에서 구하려 했던 것 같다. 너무나도 복잡한 시간이었기에 조용히 보내는 시간이 필요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생각의 양은 줄이고 생각의 질은 높이는 과정이었다.(76쪽)
소파에 앉아 밤새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하얀 커튼 사이로 스며든 코발트블루 색이 그윽하게 빛나고, 세상이 온통 푸른 빛깔로 물들어 있다. 턱을 괴고 오롯이 책에 집중한 여인이 독서의 심연으로 빠져들고, 은은한 등불이 방 안의 온기를 가득 메운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책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여인의 눈빛이 진중하고 진지하다. 어떤 페이지는 가볍게 넘어가고 또 어떤 페이지는 아주 오랫동안 시선이 머문다.(77쪽)
푸른 베일로 마음을 덮다
"너무 착하게 살지 마. 착하게 사는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
상처로 뒤엉킨 슬픈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채 벌리지 못한 입술로 나지막하게 읊조리던 목소리, 그것은 서글픈 확신이었다.
(...)
쇼펜하우어도 말하지 않았던가. 떨어져 있을 때의 추위와 붙으면 가시에 찔리는 아픔 사이를 반복하다가 결국 우리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인간은 상처로 연결되어 있고 세상은 상처로 얼룩져 있다. (89-90쪽)
베일 쓴 여인을 통해 얼굴 이면에 감춰진 내면의 상처를 담담하게 표현한 타벨의 이 그림은 상처받은 이들에게 바치는 우아한 헌사 같다.
이 그림을 보고 '상처'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여인의 눈빛은 분명 상처였다. 그녀의 표정은 상흔으로 가득했고, 그녀의 몸은 흉터투성이처럼 보였다. 누군가 내게 어찌하여 거렇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녀가 나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명석한 감정보다 분명한 의미는 없으니 말이다.
(92쪽)
좌절과 소나기는 곧 그칠 것이다
세상이라는 영겁의 정글에서 나의 목적은 생존이었다. 살아남는 일에 매진했고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좌절은 실타래처럼 이어졌고 고질적인 불안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절망으로 주저앉을 것 같은 날들이 반복되었고 삶이 이대로 끝날 것만 같았다. 깊은 절망은 결국 모든 것을 체념하게 했고, 절망이 켜켜이 쌓인 그곳에는 나를 지배하던 무기력만이 짙게 배어 있었다.
세상에 다치고 거듭 절만한 탓에 여기에 왔다. 영문도 모르고 겪어야 했던 숱한 좌절들이 나를 이곳으로 오게 했다.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을지는 모르겠지만, 무엇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 같다.(165쪽)
변화가 많은 시간이었다. 갑작스런 소나기는 지속되는 장마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온몸이 함씬함씬 젖어 마음이 축축 늘어졌다. 좌절은 끝이 없었고 희망은 부질없었다. 그러나 자연 앞에서 좌절은 모두 덧없이 사라지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았다.
(...)
그 자체로 매순간 완성이지만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 자연, 자연이 들려주는 좌절 속 희망이 거기에 있었다.
우리의 삶은 좌절을 이겨내려는 미숙한 희망으로 허덕인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늘 이렇게 즐겁고 또 버거운 일이다. 알고 있었지만 외면했던 사실 하나, 좌절과 소나기는 곧 그칠 것이다.(170-171쪽)
갑자기 피는 꽃은 없다
어떤 추억은 향기로 기억된다. 깊은 곳에 잠재된 기억을 떠올려 완벽한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향기는 때로 사진으로 돌아보는 기억보다 생생하다.
(...)
약간은 비릿하면서도 청량함이 느껴지는 이른 새벽의 비 내음은 낯선 여행지에서의 추억의 장소로 우리를 이끈다. 향기로 인해 불러일으켜지는 기억의 조각들이다.(222쪽)
드레이퍼의 그림에는 드레이퍼만의 향기가 있다. 누구도 흉내 내거나 따라 할 수 없는 고유한 향기가 난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여전히 향기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그의 그림은 평소 스쳐 보내거나 보고도 이름을 알 수 없던 야생화 같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추운 땅 속에서 헤매고 견디며 자란 싹에 매일 물을 주고 거름을 갈고 햇볕을 쐐주어야 꽃이 피어날 수 있듯이. 드레이퍼의 끝없는 열의와 고립스러운 노력이 있었기에 그의 그림이 뒤늦게 꽃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갑자기 피는 꽃은 없다. 다만 갑자기 그 꽃을 발견할 뿐이다. 간절함으로 마침내 희망을 꽃피운 드레이퍼의 열정과 끈기에 가슴 뻐근한 감동이 전해진다.
(227-228쪽)
너를 막으려 나를 가두다
여러 시련을 간신히 견뎌낸 어느 날, 해방은 우연히 찾아왔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조심스레 베란다 창문을 열어 보니,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 있었다. 따스한 햇살 때문인지 노란 꽃이 더 화사하게 빛났다. 이리저리 한참을 구경하다가, 조용히 내 방에 가서 탁상달력을 넘겨 5월에 맞추었다. 봄이었다. 나는 비로소 은신하기를 그치고 동굴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때를 떨올리면 아서 해커의 <갇혀버린 봄>이 생각난다.
(250쪽)
여인의 몸은 그늘에 숨어 있지만 그 시선은 빛을 향해 있다. 지독하게 어두운 자신만의 공간에 갇힌 채 한 발도 나갈 수 없는 스스로의 처치를 비관하면서도, 제발 나를 이곳에서 꺼내달라고 누군가에게 간절히 외치는 듯 하다. 금방이라도 찬란한 태양 속으로 뛰어들고 싶지만 도저히 나갈 수가 없다. 멈춘 시간과 함께 그녀의 마음도 갇혀버렸다.
언제쯤 그녀의 마음에도 봄이 찾아올까. 그녀의 눈빛에 삶에 대한 열망이 남아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이기심인지도 모르겠다.
(252쪽)
흔들리는 것의 아름다움
어느새 여름의 푸름은 사라지고 숙고하고 반추하는 계절, 가을이 왔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바람에 밀려오고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바람에 흩어진다. 흔들리는 것은 왜 이토록 아름다울까. 나무가 그렇고 청춘이 그렇다. 지는 것은 왜 이토록 슬플까. 잎이 그렇게 생이 그렇다. 결국 흔들리고 지는 것 모두 삶이었음을 깨닫는다. 이맘때쯤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람 부는 날 나무 아래에 앉아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있으면 죽음이 연상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281쪽)
괜찮으니 걱정 말라며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서 어떤 결락감 같은 게 느껴졌다. 차마 감쳐지지 않는 그림자랄까. 슬프도록 밝던 그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왠지 편하지만은 않았따. 아리고 미안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가 죽었다.(283쪽)
바람 앞에 가차 없이 흔들리며 쓰러질 듯 위태로운 사이프러스 나무는 갖은 풍파에 시달리는 인간의 삶과 매우 닮았다. 그러나 흔들리기만 할 뿐 결코 부러지지 않는 모습에서 힘든 고난을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의 또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고흐가 열과 성을 다해 그린 사이프러스 나무는 그의 캔버스에서 쉼 없이 흔들리며 살아 꿈틀거린다. 흔들리기에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진지하고 조용하게 말을 건넨다.
기어이 흔들리며 살아야 하는 것, 그래서 생은 기적이고 감동이며 슬픔이다.
(286-287쪽)
에필로그
갸날픈 희망의 끈일지라도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화가 조지 프레더릭 워츠(1817-1904)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그려냈다. 그가 이 그림을 그린 19세기 말에는 세기말적인 비관주의가 성행하고있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도시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면서 인권유린이 대두되기 시작했고, 여러 가지 사건 사고들이 발생하며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알 수 없는 불안감, 그리고 삶의 허망함에 물들어 갔따. 또 화가 개인으로서도 자신의 딸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일을 겪으면서 아픔의 시간을 보냈다.
(...)
그는 "이 그림에서 희망은 남아 있는 한 줄의 현을 통해 흘러나올 수 있는 음악을 암시한다."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고 한 가닥 남은 희망에도 끝까지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보았다. 그의 이런 생각은 당시 여자 친구 퍼시 윈드햄에게 보낸 편지에도 드러난다.
"나는 두 눈이 가린 채 지구 위에 앉아, 모든 현이 끊어지고 하나의 현만이 남아 있는 수금으로, 가능한 한 많은 소리를 내도록 노력하고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희망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
(290-291쪽)